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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전기인 이야기 - 30

[10. 전주 생활 이야기]

by 종구라기

10-6. ‘중소기업제품 구매촉진 및 판로지원에 관한 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결정할 때, 공공기관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바로 ‘중소기업 제품 구매 촉진 및 판로지원에 관한 법’.

이 법은 기술력과 서비스가 뛰어난 대기업 제품을 알면서도,

중소기업 제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중소기업을 살리는 일은 우리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때때로, 그 이상적인 원칙이 너무 무겁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자재는 지급자재와 사급자재로 나뉩니다.

지급자재는 발주처가 조달청을 통해 업체를 선정하여 시공사에 납품하거나 설치하는 자재이고,

사급자재는 지급자재를 제외한 모든 자재입니다.


전주 ㅇㅇ아파트의 경우,

대기업이 아닌, 국내의 중소기업에서 제작한 승강기가 설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입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기계실에서는 웅웅 거리는 권상기 소음이,

각 층에서는 도어가 닫힐 때마다 철컥하는 소리가 퍼졌습니다.

게다가 도어에는 녹이 슬었고, 센서 오작동으로 문이 열리지 않거나 닫히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AS는 제때 이루어지지 않았고, 입주자들의 민원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습니다.

“왜 우리가 수억 원을 주고 산 아파트에서 이런 승강기를 타야 하죠?”

“대기업 제품은 왜 쓰지 않았습니까?”

담당자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항의에 시달렸고,

승강기 납품업체의 대응은 늦고 무성의했습니다.

수차례 문서 발송과 통화 끝에 겨우 담당 임원이 현장에 나왔고,

기계실 방음, 도어 교체, 센서 및 필터 교체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문제는 일단락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 지쳤고, 많은 입주자들의 신뢰도 잃었습니다.

특히, 승강기 조명기구 같은 하자는 곧바로 조치가 되지 않으면 큰 불편을 초래합니다.


양심적이고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 기업을 키우는 정책은 앞으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 해도,

그 혜택이 기술력과 서비스 검증 없이 무조건으로 주어질 때,

피해는 고스란히 입주자와 현장 실무자의 몫이 됩니다.

하자 보수는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한 번의 실수는 수년간의 고통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다행히 최근 분양 아파트에서는 일부 주요 자재를 ‘사급자재’로 바꾸어

시공사가 직접 검증된 제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어 상황이 나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지급 자재로 고정되어 있는 주요 설비,

특히 민원과 직결되는 승강기 같은 경우는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관리사무소나 관련 부서에서 하자 보수· AS 이력 평가를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 화하여,

그 결과를 중소기업 제품 구매 시 반영하는 방식,

이런 실질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입주자와 실무자가 조금은 안심할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을 돕는 정책이, 국민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취지의 법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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