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현실

현실의 벽

by 일비

무대 뒤편 소수의 목소리가 전체를 지배하는 공간, 오디션의 기회가 주어져도 그 속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고 사석에서의 술자리는 단순한 친목의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대부분의 제작사들은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배우들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 같은 무명 배우는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러한 구조의 부조리는 단순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많은 신인 배우들은 좌절과 희망을 쌓아가며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우리의 존재는 마치 안개 속에 사라져가는 산의 윤곽처럼 점점 더 흐려져 갔다.


어느 날 신작 관련 공개 오디션이 있었다. 각자가 준비한 배역을 발표하는 릴레이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심사위원은 제작사 대표와 프로 선배 배우들로 구성하여 4~5분 계셨다. 나는 작품의 주인공을 준비했다. 오디션 전, 대표가 내게 물었다. “어떤 역할로 오디션을 볼 거냐?”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주인공 역할이요.”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나타난 의아함이 나를 왠지모르게 초조하게 만들었다. “다른 역할이 더 가능성이 있어.”

애당초 주인공은 다른 배우가 맡기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허무함이 밀려왔다.


공개 오디션이 아닌 캐스팅으로 애초에 진행되는 게 맞지 않을까? 고요한 호수에 던져진 돌처럼 파문이 퍼지며 수면 아래에서는 의구심과 실망이 부유하고 있었고 내 마음을 쪼그라들게 했다. 이 오디션은 명백히 형식적일 뿐 실질적으로는 이미 결정된 운명에 불과했지만 내 목표는 내 연기로 납득시키는 것 뿐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고 준비한 만큼 후회 없이 연기했다. 끝내고 나서 느낀 후련한 마음. 내정된 배우 차례에는 미워하는 마음보다 제발 잘하라는 기도가 더 컸다. 행여나 그 친구가 실수를 했는데도 주인공으로 선택된다면 나의 좌절감은 겉잡을 수 없이 짙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잘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쩌면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응원일지도 모른다.


오디션이 마무리되고 발표가 있었다. 나는 대표가 말했던대로 다른 배역으로 캐스팅되었고 그 친구는 주인공이 되었다. 결과를 알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퍼져나갔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심사위원들의 총합산 점수에서 내가 1등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주인공으로 넣자고 했지만 대표가 반대했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한계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소리 없는 한숨이 나에게 스며들며 내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오디션 발표 후 각자 해산하고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들어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사무실로 향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왠지 모를 무거운 공기에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무슨 일이세요?” 물어도 그는 되레 “왜 내가 널 불렀을 것 같냐”고 되물었다. 캐스팅 발표 이후 내 마음속 어두운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나 싶어 아찔했다. “제가 순간 서운했었나 봐요”라는 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널 지금까지 써주는 나한테 감히 서운해해?” 짧고도 날카로운 ‘감히’라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고 그의 말을 자체 음소거 처리하며 듣고 있을 뿐이었다. 화가 치민 그의 목소리는 마치 검은 구름처럼 무겁고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은 번개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그저 그 소음 속에서 내 마음을 확실히 감춰야만 했다. 더 큰 감정의 홍수 속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그가 발설하는 말들은 나와는 무관한 듯이 스쳐 보내야만 했으니까.


애석하게도 내 의지와는 달리 감정에 휩쓸려버렸다. 마치 앞에 놓인 기회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듯한 불안감이 나를 짓눌렀다. 화장실 한켠, 그 좁은 공간에서 꺼이꺼이 울며 서글픔과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켰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깊어졌다. 내 마음속의 모든 감정이 뒤섞이며 그 자리에 무겁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에도 마냥 자기 연민을 할 수만은 없었다. 나는 살아남아야 했고 내게 남은 길을 찾기 위해 일어설 결심을 해야 했다.


어떡하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나는 내 안의 불확실함을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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