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잔상

by 일비
내가 이번에 바닥을 치면서 기분 참 더러울 때가 많았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사람이 딱 걸러져. 진짜 내편과 내편을 가장한 적.
인생에서 가끔 큰 시련이 오는 거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큰 기회가 아닌가 싶다. (별에서 온 그대-천송이)




입시 학원에서 Y를 처음 만났다. 들어온 시기도 비슷했고 같은 반에 배정되면서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성실하고 예쁘고 사람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끄는 Y. 나는 Y의 친구라는 사실이 내 마음속 작은 자부심이었다.


학원 내에서 우리는 늘 ‘끼가 없다’는 말을 듣곤 했다. 선생님조차 눈에 띄는 재능 있는 친구들을 주로 칭찬할 때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며 묵묵히 연습에만 몰두했다. 끼가 있는 친구들을 제치고 우리 둘 다 결국 현역으로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서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서로 학교가 달라 멀리 있었지만 공연을 보러 가고 자주 만나며 우정을 이어갔다. Y가 전국 연극영화과 학생 중 소수만을 선발해 프로 무대에 설 수 있는 워크숍 프로젝트에 합격했다는 소식과 추천까지 해주자 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도전했고 다음 해 합격했다. 같은 바운더리 안에서 함께 무대에 설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벅찬 감사와 설렘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극단 안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겪었다.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시점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순식간에 Y의 얼굴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고 결론적으로 내 부탁을 거절했다.

그 이후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바빠도 생일이면 늘 안부를 주고받던 관계가 허무하게 끊겼다. SNS 속 Y의 소식들은 이제 그저 낯선 타인의 일처럼 느껴질 무렵, 난 그 자리에서 팔로우를 취소했다. 동시에 내 진심이 닿는 소수의 이름만 남은 목록 앞에서 관계를 축소하여 간신히 얻어낸 자유에 씁쓸한 해방감을 느꼈다.


며칠 뒤 채팅장 맨 아래 목록에 자리하던, 예상치 못한 Y의 이름이 알림 창에 떴다.

전체 보기로 봐야 할 만큼의 장문 메시지였다.
“서로 팔로우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끈이 이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속이 울렁였다. 쌓였던 감정과 기억이 동시에 스쳐가며 쏟아지는 눈물 위로 나는 젖은 시야를 닦아내고 답장을 이어갔다. 왜 그때 Y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는지 탓을 하기도 하고 내 곁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지지해 주었는지, 그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아주었으면 했다.


대화의 끝이 돌고 돌아 '네가 먼저 팔로우를 끊어서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 거야'라고 마치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본능적으로 Y를 냉정하게 밀어낼 수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왠지 모를 이끌림이 Y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게 했다. 그동안 연기가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했을까, 아니면 지난 긴 시간 동안 Y에 대한 감정이 아직 내 안에 잔여물처럼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그 순간, 지독히도 미련한 내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뒤, 나는 Y의 공연에 갔다. 불편한 설렘이 뒤섞인 기분으로 간식을 사들고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마음과 달리 표정이 경직되는 것 같아 애써 마스크로 감췄다. 오랜만에 마주한 Y는 반갑게 맞아주었지만 안 보이는 벽이 느껴졌다. Y는 곧 알바를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떠야 했고 서로 다음 만남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은 정적 속에서 '우리에게 다음은 없구나.' 애써 붙잡고 있던 인연의 끈이 힘없이 끊어지며 나는 공중으로 부유하는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애써 외면했던 가슴의 예감들이 마침내 하나의 결론으로 응축되는 순간이었다.


공연장 안, 무대 위 배우들이 움직이고 관객들의 숨소리와 박수 소리가 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그동안 쌓인 감정들을 되새겼다. 함께 웃고 함께 긴장하던 순간들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미묘하게 예전과 다른 둘 사이의 기류 속에서 마스크를 낀 것이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스쳐갔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이후 시간이 있었다면 예전처럼 다시 우정을 쌓을 수 있었을까 하는 헛된 미련은 더는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담담히 인정했다.


Y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까지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차마 놓지 못한 미련이 그 공기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그 짓눌림 속에서 나는 비로소 냉철해졌다. 더 이상 지난 상처를 파헤치거나 닿을 수 없는 인연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좋은 추억이 한때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대신, 그 미련에 잠식되지 않기로 결단했다. 나를 지탱하는 힘은 묵묵히 곁을 지킨 사람들의 변함없는 진심에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곧 내가 굳건히 발을 딛고 설 단단한 땅이었다. 흐릿한 과거에 쏟던 모든 감정의 무게를 이제 소중한 이들에게 돌려주기로 다짐하며 흘러간 관계는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과거는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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