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둑을 못 둔다. 대학 시절 한때 배워볼까 해서 책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곧 그만두었다. 가만히 앉아 있기에는 혈기가 방장하였다. 비슷한 이유로 나랑 안 맞는 것으로 장기, 민물낚시 등이 되겠다.
대신 기보를 보는 것을 한동안 취미로 하였다. 잘 이해는 안 갔지만 번호가 매겨진 흑과 백의 돌을 따라가며 해설을 읽는 재미가 깊었다. 사자성어와 알 듯 모를 듯한 바둑 격언들이 날렵한 필체로 구사된, 무협소설 같기도 하고 인생독본 같기도 했던 기보. 당시에는 주요 일간지마다 기보가 실렸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박치문, 노영하, 장수영 등의 이름이 기억난다.
이처럼 허접하나마 나름대로 바둑애호가(씩이나^^)로서 "승부"라는 영화의 개봉 소식을 접하고 기대가 높았다. 제법 기다림 끝에 관람, 대만족.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바둑과 인생과 80~90년대의 향수를 잘 그려낸 작품으로 보인다. 주인공 두 배우 이병헌, 유아인의 연기는 발군이고 조연으로 나오는 배우들에서 예전 바둑계 인사들의 면모가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조훈현 9단의 내제자로 발탁된 어린 기재 이창호가 성장한다. 어린 시절의 재기발랄과 당돌함은 점점 사라지는 대신 성장통과 함께 자신만의 기풍을 세워나간다. 이를 지켜보는 스승 조훈현과 라이벌로서의 조훈현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때로는 발빠른 포석처럼 펼쳐진다. 바둑의 이야기가 아닌 승부의, 승부사의 이야기이자 성숙에 관한 이야기여서 좋았다. 이병헌은 조훈현 했고 유아인은 이창호 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영화를 보고난 끝에 세 가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제(師弟)
스승이라는 출발점, 회귀점을 지닌 사람은 강하다. 출발점을 잊지 않는다. 사람은 출발점을 잊지 않으면 나아가고자 하는 신념의 길을 잃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중간에 어려움이 닥쳐 방황하더라도 돌아갈 곳, 회귀점이 있기에 그곳에서 다시 방향을 가늠하여 나아갈 수 이다.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은 단순한 지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전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야 온전히 비로소 전달된다. 사제관계가 지닌 중요함과 의미가 이 점이다. 누구를 스승으로 삼고 누구를 모범으로 삼아 거기에 자신을 투영하여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 궤적은 크게 달라진다. 인생의 스승을 가지는 이상으로 행복한 것은 없다.
최근에는 사제라고 하면 왠지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인상을 품기도 한다. 이 각자도생의 시대에 진정한 스승이 있어 하는 자조의 질문도 들린다. 그러나 익히고 탐구하여 길을 찾으려는 이에게는 스승이 필요하다.
사제란 같은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천착하는 최고의 동지이다. 또한 그 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 합을 겨루는 경쟁자이기도 하다. 자극을 주고 받고 상대의 성취를 서로 자랑스러워 하는 아름다운 관계.
사제는 이른바 도제관계나 주종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이 일방적인 상하관계라면 사제는 평등한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다. 제자의 자발적인 존경과 도전이 있고, 스승의 자애와 응전이 담겨있다.
드라마틱한 설정과 구성 덕분이겠지만 영화에서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는 아름답고 고결했다. 승부의 세계에 마주 앉은 스승과 제자, 적수로서 존중과 긍지 그리고 치열한 욕망의 발현은 최상급의 사제의 도가 아닐까.
학창 시절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생님을 뵈었고 가르침을 주신 많은 분을 만났다. 그러나 나를 돌이켜보면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릴 스승이 안 계시다. 뚜껑을 덮은 장독에는 빛이 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의 부족함 탓이다. 그리하여 스승의 날에 꽃다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초라해 진다.
청년
청년은 몸이 아니라 태도이다.
행복한 청춘은 수고해야 할 때에 수고하고 공부해야 할 때에 공부하는 것이다. 그것으로서 평생의 행복을 받치는 주춧돌이 마련된다. 젊을 때에 안일을 좇고 고생을 회피하면 당장은 자유롭고 해피하다 느낄지 몰라도 결국은 가장 자유롭지 못한 청춘이 된다. 자유롭지 못한 인생의 첫발이 되는 것이다.
청년의 근본 재산은 신뢰와 성실이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 자신이 딛은 발밑을 소중히 그리고 세밀히 여기며 살아가야 쌓인다.
청춘은 고뇌와 번민의 시대이다. 방향과 나아가는 일에 대한 치열한 투쟁이다. 스러지느냐 발버둥치며 일어나느냐의 아름다운 싸움이다. 냉정하고 엄하게 짚어주고 도와주는 부모와 스승과 동료를 둔 청춘은 행복할 것이다. 인터넷은 도구이되 단련해 주는 이는 아니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쇠는 뜨거울 때에 두드려진다. 차가운 물에 식었다가 다시 달구어 지고 두드려진다. 이것이 단련이다. 청춘시절에 단련할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불행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창호의 청년과 나의 청년은 달랐다. 나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욕망을 중시했고 그것에 낭만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단련되는 것의 가치를 모르고 알량한 자신감에 만족했다. 고뇌와 번민에 치열하지 못했다. 그래서.
‘왜 이 모양이야’ 하며 산다.
고난
큰 불행을 맛본 사람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괴로울 때는 이 어둠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기만 한다. 그러나 밤은 반드시 아침이 된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된다. 영원한 밤도 영원한 계절도 절대로 없다. 누구보다도 괴로워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신과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그 사람만이 이루어 낼 수 있다. 자신에게 지지 않는 한, 언젠가 반드시 열릴 때가 올 것이므로 자신을 비하하면 안 된다. 지력과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조훈현이 이창호로 인하여 무관으로 추락한 뒤 겪는 힘든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비척거린 후에 일어나 한결 달라지고 여유로와진 그의 모습이 부러웠다. 대국 시 담배 대신 사탕을 먹는 것으로 상징된 결심의 응집은 감동적이었다.
누구나 힘든 과제나 고민을 안고 산다. 고민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이겨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눈물을 쏟는 심정으로 도전한다. 그것이 삶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것 또한 삶이다.
나는 어떤 삶인가.
올해의 봄은 힘들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오고, 마음 뒤로 무엇인가가 사납게 쫓아오는데 손발은 매인 듯 둔하기만 하다. 한심과 자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완강히 막아선다. 그러니 다시 비루해지고, 다시 한숨이다.
오후에 버스정류장에 섰는데 대성리까지 가는 광역버스가 왔다. 탔다. 후회했지만 그냥 가는 데까지 가자 했다. 작은 새순이 겨우 움튼 북한강변을 걷는데 눈물이 났다. 자꾸만 무릎이 꺾이는 것처럼 허청거렸다.
“왜 이 모양이야.”
모든 게 내 탓이다. 오래 오래 감추어왔고 아닌척 해온 가식과 나태의 껍질들이 마침내 한겹씩 한겹씩 벗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미봉하려 하고 그것을 또 타조처럼 고개를 묻음으로써 회피한다.
그럼에도 길을 가야 한다. 갈 데까지 가는 거다. 길 위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라보레무스” 자, 일을 계속하자. 자 일하자.
토인비의 좌우명이었다던가. 오래전부터 습관적으로 해온 말이었다. 이 봄에 최면처럼 다시 나에게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