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에 안젤리나 졸리의 모습만 또렷했다. 알파벳으로 Maria라고 글자가 흘려 써있을 뿐 불친절한 영화 포스터였다. 오랜만의 졸리 영화, 가장 가까운 시간을 예매했다. 마리아 칼라스의 이야기라는 간단한 소개 글은 나중에 읽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제껏 마리아 칼라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칼라스에 대한 구체적인 궁금증을 갖지 않았다는 것도 희한하게 여겨졌다. 이름이야 알고 그녀의 노래도 여러 매체를 통하여 들었지만, 이를테면 일상에서 익숙하게 빈번히 사용하나 구체적인 뜻을 정확히 찾아 익히지는 않는 일반명사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
영화는 칼라스의 마지막 일주일을 그린다. 기자를 만나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털어놓는 칼라스. 가난한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불화, 무대에서의 찬란함, 그리고 오나시스와의 사랑과 이별 등 모든 것이 섞여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그녀의 마지막 인터뷰어인 기자 '맨드락스'는 그녀가 복용하던 약의 이름과 같다. 영화는 그만큼 진실과 망상 사이에서 어지럽다. 그러나 우아하고 고결하고 아름답다. 칼라스이기에, 안젤리나 졸리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공기를 진동시켜 전해지지만 칼라스의 소리는 시간을 진동시켰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소리는 남았다. 1950년대에서 60년대, 그녀는 세계의 무대를 밟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신성한 여인'(La Divina)이라 불렀다. 살아l있는 전설의 인물이었다. 칼라스는 무대 위에서 빛이었고 무대 아래에서 추앙의 대상이었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다. 40대 나이의 60년대 중반, 그녀의 목소리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랑도 잃었다. 오랜 시간 음식 대신 약을 삼키며 살아왔다. 목숨을 이어가는 일과 삶을 사는 일은 달랐다. 그녀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1977년 9월의 어느 날, 파리의 자택에서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쉰셋의 나이였다. 심장이 멈췄다고 했으나, 실은 오래전부터 칼라스의 삶은 멈춰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출했다 돌아온 집사와 가정부, 두 마리 반려견만이 지켜본 죽음이었다.
칼라스는 자주 공연을 취소했다고 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칼라스가 노래에 완벽을 추구한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나는 내 음반을 듣지 않아. 그것은 완벽하기 때문이야."
완벽을 추구했기에 그렇지 못한 상태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칼라스의 대중은 그녀를 비난했다. 무대는 멀어졌고, 대신 오나시스와의 스캔들과 패션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예술가는 무대를 잃으면 혼자가 된다. 그녀는 전성기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한때 그녀가 부르면 세상이 멈춰 섰던 그 노래들을 집사와 가정부, 반려견 앞에서 부른다. 성대를 떨군다. 허공을 움켜쥔다. 소리는 그저 맴돈다. 힘차고 맑고 곱고 높던 소리는 기억 속에서만 울림을 줄 뿐이다. 다시 한번, 또 한번. 칼라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다시 무대에 서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존중하기 위한 처절하고 고결한 사투였다. 곧 연기처럼 흩어질 자신의 운명을 예감해서 였으리라. 그녀는 끝내 자신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지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 죽음의 직전, 혼자 있는 집안에서 푸치니의 '토스카' 중 '예술을 위해 살았노라'를 부르는 장면에서 전율이 인다. 창 밖으로 퍼져나가는 칼라스의 노랫소리에 길 위의 행인들은 넋을 잃는다. 백조의 노래, 회광반조(回光返照).
우리는 깨닫는다. 칼라스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육신의 세상에서 영원의 세상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목소리는 공기를 울리는 것이지만, 위대한 목소리는 시간을 울린다. 소리가 꺼진 자리에도 울림은 남는다. 그녀의 소리는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 울려 퍼지고 있다.
영예의 시간을 보낸 자들의 후반생은 두 갈래일 것이다. 빛나던 시절만을 붙든 채 무너져가거나, 그 빛을 내려놓고 어둠 속에서 새로운 빛을 찾아가거나. 칼라스는 뒤의 것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는 슬프다. 그 슬픔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전성기를 지나간다. 각자 빛나던 순간들은 그것대로 아름답지만, 그 순간들이 지나간 후의 삶도 또 다른 의미로 빛날 수 있음을, 빛나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연배 혹은 몇 년 연장자들을 접할 때 이미 가라앉아버린 이들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떼는 말이야’, ‘아 옛날이여’로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하는 말 많고 목소리 높은 중년 혹은 초로의 사람들. 남자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회고의 방에 스스로 들어앉아 무기력을 방어한다. 자신의 경험만이 기준이 되니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고, 새로운 것을 찾고 익히려는 몸짓에는 게으르다. ‘한 장 넘기면 앞 페이지 내용이 기억 안나’라는 노화의 핑계를 앞세울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한 번에 배우는 아이, 청년이 아니다. 더더욱 새로운 시도와 반복 경험이 절실하나 현실은 특정 채널과 유튜브에 영혼을 넘긴 채 ‘여가 활동’이라 포장하는 자위가 넘쳐난다. 키오스크로 주문에 성공하고 뿌듯해하는 의기양양은 초라할 뿐이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시도하지 않는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매일이 권태롭게 이어진다. 그 권태마저 익숙해 한다. 나와 같지 않은 이들에게는 종종 ‘나대지 말라’는 말로 ‘지혜롭게’ 훈계한다. 자신의 초라함괴 조급함을 감추기에 몹시 적절한 점잖음이므로.
모두 나의 이야기이다.
지금 마주치는 모든 순간이 절정의 순간, 마지막 경험일 경우의 수가 더 높다. 그리하여 시간은 빠르고 배울 것, 할 것은 많다. 하고 싶은 것 역시.
모든 것을 새롭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젊은 날 혹은 지나간 전성기로 돌아가거나 회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비루해지지 않고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지금의 시간이 또 다른 전성기로 기억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가끔 잡문을 쓴다. 호기롭게 시작하나 마무리가 늘 어렵다. 나중에 손 봐야지 하며 미루어 둔 글을 마음먹었던 대로 손보았다면 낙양의 지가를 들썩거릴 명작이 한 질은 족히 되었으리라.
살아가는 것도 그런 듯 싶다. 어느덧 예순이 넘어버린 하루하루를 잘 채워나가고 싶다. 매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다. 아직 젊다 자신하지만 어느 장이 마지막 장이 될지는 오직 그분께서만 아시니.
호접란이 가득 심어진 축하 화분은 크고 화려하다. 한 달 혹은 두 달을 환하게 피어 주위를 빛나게 꾸민다. 빛나는 시간이 지나 꽃송이가 시들고 떨어지기 시작하면 옆으로 밀려나가다 마침내 잎만 남은 화분은 치워지기 마련이다.
치운 사람은 모른다. 잎만 남은 그 화분을 물 잘 주어 키우면 몇 달 후에 다시 꽃대가 올라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때 스스로 피어난 꽃이 얼마나 소담스럽고 색이 곱고 강한지를.
https://youtu.be/Za5V6NQDc2Y?si=SAsYYlivCB2Aqiqo
Maria Callas - L'amour est un oiseau rebe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