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화요일 저녁, 명륜동 골목길을 헤맸습니다. 몇 번이고 왼쪽,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계단을 오르고 내리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아, 여기. 혜화동 로터리에서 쭉 올라오면 간단한 곳이었습니다. 네X버 지도라는 문명의 이기가 알려준 대로 따라왔는데 하며 입이 삐죽 튀어나왔지만 곧 반성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따르지 말고 한 번 더 찬찬히 보면 좋았을 것을. 제법 나이가 들고 눈이 침침해지니 반복되는 실수입니다. 자세히 생각하고, 들여다보기 귀찮아하는 제 모습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보다 어리석은 반복이 더욱 불만입니다.
그라운드 씬이라는 소극장을 찾아 들어서니, 입구에서 이현수 집사님이 놀란 표정에 예의 크고 환한 웃음을 담아 반깁니다. 볼 때마다 부러운 백만 불짜리 웃음입니다. 극장 안에는 관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공연 작품은 부천노회 총무님인 이현수 집사님이 대본과 가사를 쓰고 연출한 창작뮤지컬입니다. “행방불명 복수 해결사.” 신앙인이 복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니, 이것부터가 아이러니라고 얼핏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복수야말로 인간이 품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 중의 하나이니 어떻게 풀어갈는지 궁금했습니다.
작은 무대 한편에 세 분의 연주자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MR로 연주하는 뮤지컬 공연을 몇 편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라이브로 연주하는 작품은 처음이라 신선하고 기대가 되었습니다. 마치 음악이 무대와 관객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형성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갈등의 당사자들 사이에 중재자가 끼어든 것처럼.
취준생 문대일이라는 청년이 주인공입니다. 드디어 취업했건만 첫날부터 상사의 괴롭힘에 시달립니다. 과장된 설정이 몰입을 다소 방해했지만 극적 과장이니 오케이. 배우들의 연기와 호흡이 집중하게 만듭니다.
문대일은 얼떨결에 복수대행업체 송민규에게 상사에 대한 복수를 의뢰했다가 발각되면서 회사에서 쫓겨나고, 송민규의 제안으로 복수대행업체에서 함께 일하다가 급기야 대행업체를 이어받아 소소한 복수를 대행해나갑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못한 상황에 처하고, 극적인 대전환의 결말을 맞습니다.
현대적인 비극의 설정입니다. 예전 같으면 술 한 잔 마시고 욕이나 해대거나, 익명게시판에 넋두리하거나, 아니면 그냥 꾹꾹 참고들 살거나 했습니다. 복수대행업체라는 것이 실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갈등 해결의 방법이 시대에 따라 진화한다는 상징이겠지요.
이 복수대행업체를 운영하는 송민규라는 청년도 취업 실패자라는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취업 못한 자들이 모여서 취업 성공한 자들의 복수를 대행한다니, 아이러니입니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이런 기묘한 비즈니스 모델을 낳았다는 것이겠지요.
작품 해설 노트에 보니 스트레스와 짜증으로 유발된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온갖 사건, 사고를 누군가 은밀하고 소소한 복수대행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발상에서 기획하였다고 합니다. 누군가 한 번쯤 해보았을 법한 상상인데 극으로 재미있게 엮어낸 재능이 부럽습니다.
'행방불명 복수 해결사'를 줄이면 '행복해'가 된다는 설명이 붙습니다. 언어유희라기보다는 작가의 긍정적인 철학이 깔려있다고 여겼습니다. 복수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복수란 결국 갈등 해결의 한 방법에 불과하고, 그것이 과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 것인가. 복수를 해결해 주는 자들 또한 행복하지 못하다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배려도 엿보입니다.
공연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해졌지만 정작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대화일까, 타협일까, 아니면 그냥 체념일까? 작품에서는 동화적일 수도 있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문대일의 해피한 방식을 보여줍니다.
젊은 배우들의 열연이 좋습니다. 특히 이현수 집사님이 쓴 노래 가사가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청년들의 현실을 냉정하게 반영한 노랫말이 분명하고 리드미컬합니다. 작품 초반부터 또 다른 줄거리처럼 이어지는 러브 라인은 처음엔 어색해 보였지만 결말에서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며 슬며시 웃게 해줍니다. 사랑이야말로 갈등 해결의 궁극적 방법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2019년 대본 공모 선정작이었는데 7년 만에 초연 무대에 올랐습니다. 젊은 창작자분들의 인내심에 박수를 보냅니다. 예술가란 참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며, 그들에게 기다림이란 숭고한 관념과 현실 사이에서의 절체절명의 타협이자, 동시에 꿈에 대한 고집일 것입니다.
지인의 작품이라 더욱 예민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중간중간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보니 더욱 몰입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본과 가사부터 연출에 이르기까지, 집사님에 대한 칭찬만이 아니라 모든 연기자와 스태프의 성취에 대한 감탄입니다. 이토록 잘 해내다니. 연기와 노래는 물론 아주 작은 몸짓까지 철저히 조화롭고, 깨알 같은 말 개그도 부지런하며, 연주와 음향, 조명도 촘촘합니다.
집사님에 대하여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어떻게 발견했을까, 그것을 어떻게 계발하였을까, 어떻게 소재를 찾고 어떻게 써 내려갈까, 작업을 대할 때의 마음은 어떨까, 성취 혹은 부족함 앞에서 어떻게 다음을 준비할까 등등. 학생들에게도 들려줄 이야기가 많겠습니다.
주위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지인들이 있지만 연출가는 처음입니다. 아니, 영화감독 친구가 있지만 만날 수는 없는. 그러면 없는 것과 진배없겠지요. 소중한 인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여성팬들의 폭발적인 성원 답지를 시샘하여... 멋진 웃음입니다.
극장을 나서니 제법 선선했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결실의 계절이 무르익는 중입니다. 이 뮤지컬은 오는 28일까지 공연한다고 합니다. 장소를 옮겨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더 길게 많은 이들이 관람하면 좋겠습니다. 재미있고, 진지하나 경쾌하고 속도감이 있습니다. 젊은 창작자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느낌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각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이야깃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가을이 익어가니까요.
이현수 집사님. 선물로 받아 치열하게 가꾼 재능을 열심히 발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모든 크리에이터는 위대합니다. 위대한 크리에이터 곁에서 저는 영광입니다. 선선하고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 9월 12일(금)-9월 28일(일) 평일 20시, 토요일 15시, 19시, 일요일 16시
▷ 대학로 그라운드 씬
▷ (작/작사/연출) 이현수, (작곡,편곡,음악감독) 이진선, (안무) 장 윤, (무대) 민병구,
(조명) 박상현, (음향) 김수현, (의상) 손유나, (제작PD) 손윤선, (음향조감독) 김하은,
(조연출) 진세원, (피아노) 이진선, 김하은, (바이올린) 조안나, (베이스)김정현, 남희중,
(드럼) 최소올
▷ (기획) 하이컴퍼니, (제작) 엔디오티컴퍼니
https://youtu.be/scsJZ67ssDY?si=2_gOQExm97au_IiC
Load out and Stay - Jackson Brow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