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치혜 Aug 20. 2021

초음기(初飮記). 초음기(超淫氣) 아니다, 네버.


    음주가무 - ‘무 舞’는 아니다, 못 한다 - 를 좋아한다. (‘가, 歌’는 좋아하나 타고난 바탕이 그리 좋지 못하여 목소리 좋은 이를 향한 흠모와 질투를 늘 지니고 있다. 어디에든 가서 우긴다. 존재론에 대한 생각이 깊고 전인류애적 사랑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사춘기 시절에 변성기가 찾아왔다. 당시 성정의 질풍노도로 인하여 목소리 다듬는 데 실패하였고, 오늘날 요 모양 요 꼴이라도 된 것은 타고난 심성이 순하고 박하여 된 것이다’ 라고. 

    그럼에도 신은 공평하여 듣는 귀와 박자, 음정에 과히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재주는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어린 날 음악에 관한 별호는 감히 “가요백년(전주만 들어도 노래를 맞추는 공력)”, “천분지일(박자를 1천분의 1만큼만 틀리는 지경이라는 의미)”이었거니와, 지금은 그때만은 못하지만 섬기는 교회의 ‘10大 테너’로서 명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현재 우리 교회의 테너는 여섯 명? 일곱 명?이다 ――;; 

    코로나로 인해 노래를 할 기회가 없다. 노래방 출입의 기회가 허락되는 날 목청껏 노래하리라. 그 첫 번째는 “Lonely Night(부활)”가 될 것이요, 두 번째는 “사랑 그놈(바비킴)”.

  

    음주인으로서의 성상은 어언 불혹을 겨누고 있거니와 그 경지는 충년(沖年), 지학(志學)에조차 못 미치는 것이 분명하니 썩 내세워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다. 다만 얼마 전에 읽은 무애 양주동 선생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를 기리는 뜻에서 나의 보잘 것 없는 주사(酒史. 酒邪 아님)를 찬(撰)해 보고자 할 뿐이다.

    내 생애 최초의 음주는 중학교 1학년의 어느 초여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이리(지금의 익산)에 계시던 외할머니께서 딸네 집에 다니러 오셨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니 외할머니께서 사기 밥그릇 뚜껑에 막걸리를 찰랑찰랑 따라서 건네셨다. 

    엄마와 함께 목욕탕을 다녀오신 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덥고 갈증이 날 때 시원한 막걸리 한 잔 또는 맥주 한 잔 이상 가는 것은 없으리. 외할머니와 엄마 두 분 다 술을 드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그날따라 집으로 오시는 길에 막걸리 한 통을 사들고 오신 것이었다. 오랜만의 모녀 욕탕 상봉의 반가움에 상호 세신작업에 정성을 과하게 기울이셔서였을까? 아무튼!

    할머니께서는 어린 손자에게 막걸리 마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 부끄러우셨나 보았다. 아니면 공범을 만들려하셨나^^

    “남자가 술 먹는 거 숭 아녀. 한 모금 마셔봐라.”

    “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어요. 못 마셔요.”

    할머니께서는 설탕을 한 숟가락 떠서 예의 밥사발 뚜껑 막걸리잔에 붓고 휘휘 저어주셨다. 한 잔(?)을 원샷(?)하니 너무 달아서 진저리가 나는 것 같았다. 할머니께서 어라 잘 마시네 하시며 한 뚜껑을 더 따르시고 설탕을 넣으려 하시기에 그냥 주십사 하고 받아서 또 원샷(?)을 했다.

    시원했다. 텁텁하면서도 부드럽고 매끈한 액체가 목구멍을 지나 내려가는데 식도며 창자까지 그 노도가 밀려가는 것이 느껴지는 듯 했다. 달큰하고 맛이 제법 있었는데, 먼저 설탕을 탄 막걸리보다 안 탄 막걸리 맛이 더 좋았다. 내친 김에 제대로 한 잔을 청할까 하다 보니 외할머니 옆에서 그녀의 외동딸이자 나의 모친의 평소 자애안(慈愛眼)이 빠른 속도로 엄모안(嚴母眼)으로 바뀌어 감으로 속히 단념하였다.

    막걸리 본연의 맛을 더 좋아했고, 음주 첫 판에 일배우일배(一 盃又一盃)의 의도를 품었으니 필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디엔에이가 발동한 것이었으리라. 그날 이후 부지런히 권주하였으면 내처 제법 훌륭한 호주가(豪酒家)로 자라났을지도 모르겠지만 소년은 부지런히 권학하였다, 고 한다.     

    내가 술집에, 손님으로, 처음 들어간 것은 나이 스물의 헌헌장부 시절이던 1981년 12월 하순의 겨울밤이었다. (사실은 아니다. 돌아보면 내게 헌헌장부의 시절 따위란 없었다. 이십 대의 헌헌장부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재수생으로서 학력고사를 마치고 고등학교 동창이자 농구친구인 둘을 만나 모교에 갔다. 한 친구는 나와 같은 재수, 한 친구는 반수. 

    생활기록부, 졸업증명서 등의 입시 관련 서류를 뗄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시원하게 농구를 한 판 했는데 어디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재수 생활이 젊은 뇌세포에 미치는 악영향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그 어마어마하던 총기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관련해서는 썩 기억이 나는 것이 별로 없으니.

    아무튼 저녁이 되었다. 지금도 왜 그렇게 불리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중계소 앞’이라는, 모교 아랫동네이자 노량진 수산시장 맞은편의 버스정류장 근처에 있던 한 프라이드 치킨 호프집에 들어갔다. 그 동네는 지금도 그렇지만 해가 떨어지면 별반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은 곳이었다. 특별히 번화한 상가는 없었고, 큰길 뒤쪽으로는 재래시장이 한 골목 형성되어 있었다. 시장통은 이른 저녁에 복작거렸지만 큰 길가에는 고만고만한 작은 식당과 가게, 맞춤양복점, 도장, 열쇠, 수제제화점 같은 상점들이 한산한 사이사이로 선술집과 치킨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 중의 한 집이었다.

    가슴께 오는 칸막이가 한 쪽 벽으로 쳐져 있고 홀에는 네모난 테이블이 몇 개 놓였다. 주전자가 얹힌 커다란 등유 난로가 내뿜는 온기가 막 문을 열고 들어선 우리의 어깨를 조금 펴주었다. 아저씨, 아줌마 몇이 호프를 마시며 낄낄 깔깔거리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수군대고는 하는 칸막이 자리에서는 왠지 음험한, 우리가 아직은 들으면 안 될 것 같은 성인의 냄새가 풍겼다.

    나는 좀 겁이 났다. 학생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어정쩡한 주제에 술집은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일 텐데. 온전한 재수 친구도 같은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시 큰물에서 놀아본 자는 달라도 뭐든 다른 법이다. 대학 한 학기를 마치고 반수의 길을 택한 친구는 매우 당당했고, 매우 위엄있게 자리에 앉았다.

    “야, 야, 빨리 앉아. 빨리 시원하게 한 잔 빨고 가자.”

    오옷. ‘빨다’니. 왠지 토속적으로 에로틱한 느낌을 내뿜는 저 단어를 저리도 자연스레 구사하다니.

    “아저씨, 저희 치킨 ‘두 마리’하고 오비 ‘두 병’ 주세요.”

    사장님은 뻥튀기와 오비맥주를 테이블에 놓으며 건성처럼 나를 보며 물어봤다. 학생들 몇 살이야. 그리고는 반수 친구 얼굴을 보더니 으응~하며 이내 주방으로 향했다. 친구는 노숙(?)하기로는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밀리지않을 마스크의 소유자였다. 

    긴장되고 어리둥절했다. ‘노숙이’가 채워준 맥주잔을 들고 셋이서 챙~하고 부딪쳤다. 경쾌했다. 그리고 시원하게 쭈욱..이 아니라 머금듯이 한 모금을 마셨다. 무슨 맛이라고 할까. 약간 씁쓸하면서 아련하게 신맛과 단맛이 섞였는데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청량감은 그때까지 먹어본 어떤 액체와도 달랐다. 새콤달콤한 무를 하나 씹었다. 근사한 맛이었다.

    큰 접시에 치킨이 두 마리 나왔고 시장기와 고소한 냄새에 이끌린 그 맛은 기가 막혔다. 연신 치킨을 먹으며 간간이 맥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맛있었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됐다.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는지, 입에서 술 냄새는 나지 않는지.

    “술은 안주를 잘 먹어야 취하지 않아. 그렇다고 여럿이 있을 때 안주만 디립다 먹으면 안주빨 세운다고 욕먹으니까 눈치껏 해야지.”

    노숙이가 말했다. 역시 한 학기 동안 여러 술자리에서 익힌 실전 경험은 달랐다. 

    ‘취하지 않기 위하여’ 치킨 한 마리를 더 시키고 그에 곁들여진 양배추와 치킨무까지 푸짐하게 먹은 후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그 집을 나왔다. 노숙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곧 터질 것 같았다. ‘온전한 재수’에게 내 얼굴도 저러냐고 몇 번이나 물었고 그때마다 표시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 앞에 도착해서 근 삼십분 가까이 대문과 세탁소 앞을 왔다 갔다 했다. 엄마와 친한 세탁소 아주머니가 술이 올라 벌개졌을 것만 같은 내 얼굴을 볼까봐 무척이나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세이프. 집에 들어가 서둘러 양치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난리를 쳐대는데 다른 식구들에게는 들리지 않나 보았다. 은근히 후회가 됐다. 치킨만 먹을 걸 괜히... 맨날 엄마가 동네 아주머니들한테 나에 대해 말씀하시던 게 맞았다. 쟤가 애가 참 착해서 나쁜 친구들 만날까봐 걱정이야. 친구들은 위험하다.

    아버지께서, 천둥처럼, 나를 부르셨다. 헉. 왜 그러시지? 내 얼굴을 보셨나? 아까 고개를 푹 숙여서 잘 못 보셨을 텐데. 다녀왔습니다 할 때 술 냄새라도 났나? 들이마시면서 복화술로 했는데. 거울을 보았다. 얼굴은 멀쩡해보였다.

     마당 불 꺼라. 휴~ 네.

    자리에 누웠다. 술기운 탓인지 잠이 쉬 오지 않았다. 프라이드 치킨의 고소한 맛과 치킨 무의 새콤달콤한 맛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맛있었는데... 갑자기 씁쓸하고 시고 달고 시원한 맥주가 입안으로 넘어오는 것 같았다. 꿀꺽, 마른 침이 삼켜졌다.

    나의 생애 첫 술집 방문은 이렇듯 장엄하게 끝을 맺었다. 청년 셋, 치킨 셋, 그리고 맥주는 자그마치 둘! 첫 자리로는 과한(?) 양임이 분명함에도 전혀 취기가 오르지 않았고 용모와 행동거지에 빈틈이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대견한 일이라 할 것이다. 이날 얻은 자신감이 향후 이십 여 년간 이어지는 7천여 회의 주석과 연회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음을... 허약해진 간을 부여잡고 후회하는 바인 것이다.

    그날의 두 친구와는 당연히 지금도 자주 만나 술을 나눈다. 자신하건대 내가 제일 세고 ‘노숙이’가 제일 못 마신다. 치킨 세 마리 시킬 때 알아봤어야 했다.          

to be continued, if possible...     

작가의 이전글 가을비 ASM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