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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Sep 19. 2021

능소화 필 무렵 3

   작년에 용기백배해서 시작한 글인데 지지부진합니다. 가자니 힘이 부치고 끊자니 그나마 쓴 글이 - 글 씩이나 - 아쉽고...  써놓은 것 조금 손을 보고, 어떻게든 이어서 마무리를 해보려 합니다. 이것 역시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고~고~


   종로와 명동에서는 몇 차례 술을 마셔본 적이 있었고 숙명여대와 이화여대 앞에도 단체 미팅하러 한두 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돈암동은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버스로 한 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이곳은 무척이나 색다른 분위기였다. 흑석동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여자대학이 있어서 여대생들의 웃음이 넘쳐났다. 그들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은 여고생들 혹은 여고생으로 보이는 앳되고 어색한 화장의 소녀들이 노점이 가득한 길을 메웠고, 당연하게도 그들의 주위를 따라다니는 짧은 머리의 남자아이들은 짐짓 큰 목소리와 몸짓으로 과장된 기개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한여름의 개울 속을 부지런히 휘젓는 작은 물고기 떼처럼 그들이 지나고 간 자리에서 몇 걸음 건너가면 시장이 있었다. 흑석동의 그것만큼이나 커 보였다. 

   그 길을 조금 지나니 또 다른 어른의 세계. 낮에 보았으면 분명히 촌스러웠을 네온의 조명, 아주 직설적이거나 아주 소녀 취향인 이름의 간판들 - 이를테면 ‘벌떼’,‘과부촌’이거나 와 ‘우산 속’, ‘전망 좋은 집’ 같은 – 이 어지럽게 섞여 성인전용 술집과 고급 레스토랑과 맥줏집과 비싸 보이는 고깃집이 나래비로 있었다.

   석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어리둥절하는 티를 안 내려 애를 쓰며 천천히 한 집 한 집을 살펴 나갔다. “Que sais Je?" 저만치에 석호가 찾는 집의 네온이 보였다. 짙은 색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어 기둥과 아치로 입구를 만들었고, 그 한가운데 위에 작은 나팔꽃 모양의 조명이 달려있었다. 무성한 아이비 등걸이 문부터 차츰 차츰 벽을 타고 올라가 가로수 불빛을 꼭대기에서 받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의 이파리가 하얗게 보일 수도 있구나, 석호는 혼자 주억거렸다. 진갈색의 두꺼운 나무로 만든 출입문의 눈높이 한 가운데에는 그 목질의 육중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색이 바랜 듯 한 가로 세로 한 뼘 크기의 간판이 단순하게 박혀있었다. 아마 처음에는 아이보리 색이었으리라. Beer, Wine and Steak.

   안으로 들어갔다. 침침한 조명, 영성과 현택, 종운과 우현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듯이, 그러나 누가 보아도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는 어울리지 않는 제스추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는 듯 사뭇 기계적으로 석호에게 오른손을 들어 알은  체를 했다.     

   어제 저녁이었다. 석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다방으로 영성이 전화를 했다.

   “야. 내일 성신여대 앞에서 보자. 아주 죽이게 한 판 쏠게.”

   크리스마스 시즌 대비 연애 작전의 일환으로 영성의 친척 형이 거하게 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야. 일단 나와서 사귀어 두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될 형이야. 씨발, 별명이 돈암동 돈병철이야. 우리 당숙이 겁나 부잔데 외아들이야. 영혼이 해맑아. 뭐 걱정할 게 있어야 잔머리를 굴리지. 우리 형이지만 존나 단순 무식해. 그냥 비싼 거 때려 먹어보자.”

   석호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빠지면 왠지 배신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이런 때 들어만 본 음식들 한 번 먹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다 싶었다. 병맥주를 시켜 놓고 한 잔씩 마시고 있는데 영성의 친척 형이 들어왔다. 스물 여덟. 일수 가방을 손목에 찼다. 크게 로고가 박힌 티셔츠에 검정 자켓, 야구모자. 뽀얗게 피둥피둥한 동그란 얼굴에 이십대의 고민 따위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뜸 반말. 어색하게 깊은 쌍꺼풀. 거침이 없었다. 

   “아 씨발, 오늘 실밥 풀었잖아. 존나 이상하지? 한 삼일 지나면 자리 잡는데. 확실히 눈썹이 눈 안 찌르고 눈 커졌어, 씨발.”

   접두사가 ‘씨발’이었고 접미사가 ‘씨발’이었다. 석호는 마음에 안 들었다. ‘Que sais Je" 는 불편했고 영성의 친척 형은 싫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러 나갔다. 영성이 나왔다.

   “야, 근데 네 형이 왜 우리한테 술을 사냐?”

   “응. 내가 오늘 소개팅 해준다고 했어. 씨발, 크리스마스라고 얼마나 징징대는지.”

   “그러냐. 그럼 니가 주선자네, 제 머리 못 깎는 크크?”

   “그러거나 말거나. 잘 되면 둘 다 좋지 뭐. 저 형네 진짜 부자야. 우리 꼰대는 씨발, 새발의 피 정도. 존나 부러워.” 

   둘은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야 영성아. 그런데 왜 안 와? 너 뻥카 친 거 아냐?”

   “형. 내가 삼십 분 시차를 뒀어. 그리고 형, 걔는 오늘 소개팅인 거 몰라. 친구들끼리 한 잔 하자고 하는 건 줄 아니까 오면 형이 알아서 잘해.”

   “예쁘냐?”

   “일단 봐. 분명 맘에 들 거야. 형 같은 또라이가 만나기에는 과분하지. 크크”

   “저 새끼가.. 안 예쁘면 넌 죽는다.”     

   한 잔씩 건배를 하고있자니 출입문이 열렸다. 한 사람이 “Que sais Je" 안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렸다. 침침한 조명 속에서는 알아보기 어려워야 당연했지만 석호는 한 눈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야, 이 집은 뭐야. 석호야 너는 여기 웬일이야? 이 분은 누구셔?”

   “아, 일단 앉아. 우리 사촌 형인데 오늘 같이 놀기로 했어.”     

   석호는 기분이 이상했다. 찜찜하고 불쾌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게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고, 당황스러워 하는 형은의 표정에 마치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아 어찌할 바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능숙하게 형은을 대하는 영성의 친척 형 모습이 싫었고, 요란하게 형은과 친척 형 사이에서 너스레를 떠는 영성이 싫었고, 영성과 친구들 때문에 싫은 티를 제대로 낼 수 없어 불편해하는 것 같은 형은에게 미안했고, 그 앞에서 형은을 위해 아무 것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자신이 한심했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석호는 별다른 말 없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까무룩 정신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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