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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Oct 04. 2021

雜 하나.     요.천.

     10월 4일. 월요일. 대체 공휴일. 평소와 같이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나, 5시 교회 도착, 준비를 하고 새벽예배 유튜브 생방송 송출을 마치니 6시.

     금요일부터 이리저리 궁리한 대로 삼척으로 가자! 카메라 충전도 마쳤고, 읽을 책 한 권과 노트북도 세팅 완료. 운전이냐 고속버스냐만 결정하면 되는데, 아차! 출발하기 전에 급히 공지해야 할 회의 자료는 마쳐놓고 이따 업로드만 하자. 부실에서 노트북을 켜고 스탠드를 켜고 커피물을 올리고 안경을 고쳐 썼다. 


     아침에 출발해서 사진 몇 장 찍고, 카페질 좀 하다가, 밥 먹고, 한 잔 하고, 저녁에 올라오려면 여정도 마음도 바쁘다. 어제의 마라톤 회의 메모를 죽 펼쳐놓고 파일을 수정한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은 무슨. 일 시작하니 쓰고 고치고 붙일 것이 가을 밭 고구마처럼 줄레줄레 달려 나온다.


     8시. 눈은 아리고 부족한 잠의 유혹이 아련하나 짙게 어깨를 누르는 듯하다. 의자를 뒤로 젖히며 30분만 자자 했다. 엉망진창 뒤죽박죽 꿈속을 버둥거리는데 정말 꿈같은 벨소리. 총무님. 이번에 저희는요... 아.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9시 19분. 이런 된장. 텄다. 삼척은 무슨. 일이나 하다가 오후에 짬 나면 운동이나 가자.


     허기 급발진. 생각해보니 어제의 엄청난 활동대사량에 비해 종일 먹은 것은 너무 부실했다. 나가서 사 먹자니 귀찮고도 이른 시간. 냉장고를 열어보니 이것저것하고 얼린 밥 한 주먹. ‘나는 자연인이다’ 스타일의 급식 준비 시작.

     자투리 김치와 국물, 고등어 꼬리 부분 반 토막, 동원 야채참치캔 작은 거, 노브랜드 비엔나소세지 몇 개, 권사님께서 울릉도 여행 선물로 주신 건오징어 반 마리, 배민에서 가져다주었을 고추장 조금, 마늘 세 쪽, 토마토 케찹.


     작은 냄비에 동서 현미녹차팩을 우려내고 고등어를 넣어 해동시켰다. 동시에 건오징어를 찢어 넣으며 최대한 ‘안 건오징어’가 되게끔 뜨겁게 기도.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인터벌을 둔 뒤 나머지 재료들을 투하. 장렬하게 끓어오를 무렵 맛술을 스냅 두 번으로 넣어준 뒤 다시 끓어오를 때 케찹을 세 번 짜 넣고 고루 섞어준다. 소금 두 꼬집. 교회 마당 화분에서 동양란처럼 키우는 대파 한 줄기를 성둥성둥하여 넣고 뚜껑을 덮은 후 약불로 1분, 잠깐 10초만 더! 맛과 향이 고루 섞이도록 뚜껑을 닫아둔 채 있으니 띵! 소리로 전자렌지가 얼린 밥의 해동을 마쳤음을 알린다.


     문제는 이 다음부터이다.

     이 재료와 이 방법으로 만드니 무어라 이름을 붙일 염치조차 없는 그저 뜨거운 잡탕의 '액체, 고체 혼합물'이 출현할 것이리라. 맛은 지옥의 그것일 터.


     그저 허기를 달래고 연명하기 위하여 데워진 밥을 한 젓가락 입에 넣고 몇 번 저작한 뒤(격에 맞지 않게 고급진 단어를 사용했음을 용서하시라. 원래 없는 애들이 있는 체한다) ‘액체, 고체 혼합물’의 내용물을 잘 섞어 한술 떠서 구강을 통하여 인후로(역시 격에 맞지 않게 고급지다) 흘려 넣었다. 

     단말마적 외마디. 이런 된장!!!   

   

     맛있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맛있다. 이를테면 ‘카오스의 하모니’라고나 할까. 전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들이 마치 염천에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하듯 제 나름의 한껏 혼돈을 떨친 후에 조화로 잦아들었다 할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제 신병(神病)같은 나의 데스티니를 받아들이고 딸아이의 날 선 작명 앞에 겸허해져야 하리라. 뜨거운 피와 디엔에이에 깃들어져 있는 본능의 그것. 

     요천!

    요.리.천.재!     


*과한 업무와 스트레스는 종종 정신을 혼미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지금의 내가 그러하다 ㅎㅎㅎ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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