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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Aug 20. 2021

소풍(逍風)

 

    저는 ‘소풍’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휴식을 위하여 야외에 나감’이라는 사전의 뜻 새김보다는 입술을 오므리며 내는 “소”, “풍”이라는 소리가 좋고, ‘노닐다’와 ‘바람’이라는 한자의 결합이 멋스럽습니다. 여행보다는 부담스럽지 않고 산책보다는 조금 진지한 느낌. 솔직하게는 제가 한가로움이나 여유 같은 것들과 그리 친하지 못하다보니 즐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반짝이는 것들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지요. 별이 그렇고 동경이 그렇듯이.

    게다가 좋았던 소풍의 기억도 별로 없습니다.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의 소풍은 그저 귀찮은 단체 행사에 불과했고 고등학생 때야 딱히 그럴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회사에서 가던 야유회, 그 상투적인 구성이라니. 딸아이가 어릴 때 함께 가곤 했던 한강 둔치나 동물원 나들이, 혼자 걷는 산길과 자전거 타기 정도가 제게는 기억에 남는 소풍입니다.      

    달포 전, 운전을 하며 화성시를 지나오다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는 소풍의 추억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1983년 여름,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진안리, 친구 P의 시골집에서의 하룻밤이. 그 며칠 전에 대학 친구들과 10여 년 만에 나눈 릴레이 통화가 촉발시킨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83년, 1년간의 어문계열 신입생 생활을 보내고 학과 소속이 되었습니다. 동기의 숫자가 많은 계열 소속 학생으로서의 1년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았습니다. 극도로 내성적이고 소심한 스타일이었던 저는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요새 말로 ‘아싸’되기가 십상이었지요. 그러다가 학과 소속이 되니(우리는 신설된 학과였고 규모가 작았습니다) 많은 변화가 생겼고 그중에서도 과 친구, 과 선배가 생겼다는 사실은 크게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끌리고 자주 어울리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L형과 P, Y, C, L 그리고 조금 뒤에 J형까지. 거의 매일 만났고 거의 매일 마시며 무척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쌓았습니다. 형편과 성격은 다 달랐지만 베풀기를 좋아하고 남한테 모진 소리를 못하는 순함은 우리들의 공통분모였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는 유일한 ‘시골(^^)’ 출신인 P의 수원 병점 본가에 놀러가기로 정했습니다. 그동안 P에게서 고향동네와 고향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그 이야기 위에 우리들의 낭만적인 상상이 여러 겹 쟁여 있었기에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결과도 역시!

    특별한 준비도 없이, 학교에서 만나 놀다가 오후 늦게 출발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수원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도착하니 저녁이었습니다. 둘러쳐진 담장 가운데의 커다란 나무대문을 삐걱 소리로 열고 마당에 들어섰습니다.

    양 옆으로 광과 방이 연이었고, 깨끗하게 비질이 된 널찍하고 네모난 시멘트 마당 건너편은 대청이었습니다. 댓돌 위에 고무신과 슬리퍼가 가지런하고,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대청 벽에는 오래된 여러 개의 액자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P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흑백사진도 있고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하며 P의 형제자매들의 입학식과 졸업식 사진, 군복을 입은 아버님께서 허리에 손을 척 얹고 다소 과장된 늠름함을 뽐내는 사진들과, 자식자랑의 중요 소재였음이 분명한 상장이며 표창장들이 끼워져 있었습니다. 벽을 따라 처마 밑으로는 시래기와 나물 같은 것들이 새끼줄에 엮여 매달려 있고, 표현하기 어려운 구수한 향기와 기운이 가득 차 처음 온 곳인데도 생경하지가 않았습니다.

    안방 문이 열리고 P와 똑 닮은, 아니 P가 똑 닮았지만 P보다 훨씬 미남이신 아버님과 순하고 뽀얗게 웃으시는 어머님께서 나오셨습니다. 작은아들의 대학교 친구들이 궁금하셔서 많이 기다리셨던 것 같아 죄송했습니다. 아무튼 젊은 것들이란...

    큰절로 제법 인사를 갖추고 대문 옆의 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님께서 저녁상과 담근 술을 차려주셔서 고봉 밥에 포식을 하고 술 한 잔씩을 하고 있는데 P의 형님이 들어왔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보다 네다섯 살 위일 것입니다. 훤칠한 키에 넓은 가슴, 잘 생겼습니다. 양 뺨부터 덮은 구레나룻이 풍성해서 아침의 푸르스름한 면도자국이 저녁이 되면 거뭇하게 짙어지는 쾌남 스타일. 

    술상 앞에 둘러앉은 우리 맞은 편 의자에 자리잡은 형님은 그때까지 듣도 보도 못한 달변으로 우리를 휘어잡았습니다. 셰헤라자드의 천일야화가 그리 흥미진진했을까요? 조금도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듣던 우리들이 올라오는 술기운에 한 명씩 두 명씩 눈꺼풀의 무게를 견디느라 끙끙대던 늦은 밤이 되어서야 형님의 모노드라마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몸뻬와 추리닝 바지에 고무신을 나눠 신고 우리는 마을 뒤편의 개울로 나갔습니다. 긴 막대와 족대, 양동이, 고추장을 비롯한 약간의 양념, 양파, 호박, 밀가루 반죽 따위와 담근 술을 받쳐 들고 P의 형님의 뒤를 따라갔지요. 맞습니다. 천렵을 나선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일생의 첫 경험. 그리고 잊히지 않는 맛. 땅을 세숫대야만큼 파고 그 주위에 돌들을 둘러 쌓아 만든 임시 아궁이에 불을 피웠습니다. 고추장과 양념을 푼 양동이를 아궁이 위에 척 올려놓고는 엄지손톱으로 터프하게 배를 딴 이름도 모를 작은 물고기들을 넣고 끓였습니다. 양동이가 불에 시커멓게 그을리고 국물이 펄펄 끓어오를 때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고 휘휘 저었을 뿐인데, 세상에나! 천렵과 와일드 라이프와 음식에 대한 형님의 박학달변을 술잔에 담아 마시고 진한 국물과 건더기를 삼키니 함포고복의 태평성세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들풀이 우거진 동산에 올라 각자의 희망과 푸념과 개똥철학을 나누다가, 비상시에는 활주로로 쓰이도록 만들어졌다는 끝없는 일직선의 도로를 내려다보다가, 야구하러 올라온 동네 초등학생 꼬마들과 시합을 벌여 콜드게임 급의 대승을 거두고는 좋아라 휘파람을 불어대며 이문세와 조용필과 김수희를 흥얼거렸습니다. 코에 칠월의 싱그러운 바람을 가득 담은 채 동산을 내려올 때 콧속에는 7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가득 담겼지요. 

    농사철이라 한가한 병점 읍내 다방에서 무료함에 지쳐 도끼빗질만을 일삼던 디제이에게 신청곡을 몇 곡 선물해주며 시시덕거린 즐거움은 보너스. 우리의 1박2일 소풍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30여 년 전의 이야기에 온갖 추억들이 줄줄이 달려 나옵니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 더듬을수록 짙어집니다. 그 끝에 아픔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그날 개울의 얕은 물줄기와 돌돌거리던 물소리, 땀을 뻘뻘 흘려가며 수제비국과 함께 퍼 넣던 왁자지껄, 바람에 하늘거리던 동산의 풀빛이 제법 또렷합니다. 

    그 여름을 보낸 후 우리는 군대를 가고, 큰일을 겪고, 청춘을 고민하며 만났다 헤어지다가, 이른바 사회로 나갔습니다. 바빴습니다. 뜸해졌지요. 그래도 다른 그룹의 친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많이 기댔고 친구들은 저를 많이 잡아주었습니다. 치기 가득한 까불거림과 근거도 없는 자신감에 너그럽게 웃어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를, 제가 가진 보잘 것 없는 몇몇 재주와 장점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들키지 않고, 어디에서든 치이지 않으려 애면글면하던 제게 그들은 고마움의 완전한 대상이었습니다. 기댈 곳이었고, 주저함 없이 기대었습니다. 

    그날 전 까지는.  

  

    오랜만에 Y와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잦은 헛발질로 온통 지치고 곤궁했던 때였는데 그 자리를 통해 힘이 솟았습니다. 

    그와 헤어진 다음날,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제 앞에 줄줄이 펼쳐졌습니다. 사방은 절벽이 되었고 저는 날개와 부리와 발이 꺾였습니다. 허우적거리기만 했습니다. Y와의 자리에서 용기백배하며 품었던 계획과 그림과 포부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벽은 더욱 가파라져만 갔고 저는 협소한 꼭대기에 갇힌 채 마음을 다치고 몸이 상했습니다. 자존심이 삐쭉삐쭉 내미는 가시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고, 그래서 더욱 저의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거의 모든 인연에 마음을 닫았고 몸을 가렸습니다. 친구들이 저를 궁금해 하고 걱정한다는 이야기는 풍설에 실려 왔습니다. 고맙게도 그들은 애써 나서서 저를 찾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리라는 믿음이었고 조금 쉬라는 배려였습니다. 벌써 14~5년 먹은 세월의 이야기입니다.     

    휴대전화번호 국번이 세 자리에서 네 자리로 바뀌면서 갖고 있던 연락처도 모두 지워졌습니다. 번호야 알려면 어떻게든 알 수 있었지만 마음이 지워진 것이었지요. 오며 가며 어떤 장소나 물건, 상황에서 그들의 기억이 떠오르면 세차게 머리를 저었습니다. 그런다고 무슨 진정 효과 따위가 있으랴만 그렇게라도 않으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가끔씩은 혼술을 하며 질질 짜는 때도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내상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단 한 가지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친구들과 다시 이어지기 전까지는 그들의 부모님께서 건강히 계시기를... 큰 슬픔이 닥쳤을 때 그 자리에조차 가볼 수 없게 된다면 저는 영영 나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잊고자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신길동 집에 들렀을 때마다 한없이 포근하시던 L의 어머님, 호방하게 스스럼없이 대해주시던 C의 어머님은 특별히 기억했습니다.     


    달포 전 그날 친구들과의 통화 후 개설된 단톡방에서 술 한 잔하자는 약속이 잡혔습니다. 이른바 신년회. 짐짓 쾌활하게 참석하겠노라 대답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 적절한 단어가 아닙니다. 14~5년 만을 표현하기에는 - 만날 얼굴들을 떠올리며 설레었습니다.

    약속 장소로 가면서 엄청나게 망설였습니다. 이십분도 더 전에 도착하고서도 식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근처를 하릴없이 돌아다녔습니다. 통째로 부서져 날아가 버린 십여 년의 시간이 간직할만한 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끊기고 상처 입은 수많은 인연과 일들에 사과할 수 있는 용기가 있나? 머리를 깎거나 몸을 바쳐 수도의 길을 걸으며 번뇌를 끊은 주제가 못되니 차라리 이제까지처럼 만나지 말고 단지 미안해하고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맞지 않으려나. 고마운 추억이라도 남겨져 있으니 감사해 하며. 첫 마디는 뭐라고 하지?    

 

    마치 너덧 달쯤 전에 만났다 헤어진 것처럼 일상의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이건 어찌해야 돼?” 라며 물어왔습니다.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육두문자를 곁들이며, 객쩍은 음담패설도 낄낄거렸습니다.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2차로 호프집에 가서 잠깐, 아주 잠깐 눈물이 비쳤고, “저거 늙어서 그래, 집어치워!” 라는 일갈에 기대어 같이 흘흘거렸고, 자리를 마쳤습니다. 고마웠습니다. 그들이 섬세하게 감춰놓은 배려에.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볕 좋은 날 잡아 함께 소풍 한 번 가보렵니다. 괜히 어머님들도 한 번 찾아뵙고요. 그럴 수 있으려나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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