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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Jun 23. 2022

그래본들.

    뜻하지 않은 경험 따위로 새로운 습관이 들거나 조심하는 일들이 생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도 사람들의 그런 행동거지에서 파생된 것일 게 다. 

    나에게도 이런 종류의 몇 가지 행동 패턴이 있다. 

    어떤 것은 너무 쪼잔하고 부끄럽고 해서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쓴다. 생리적인 현상과 관련된 것이거나 제 성질을 못 이겨 울컥 치받게 되는 상황에서의 대처방식 따위가 그렇다.    

 

    이런 것 말고도, 진행병이 있다 보니 여러 무대와 행사장에서 이야기 또는 발표 등을 할 기회가 제법 있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준비 없이 올랐다가 당황했던 몇 차례의 경험 덕분에 꼼꼼히 메모로 준비하는 습관이 생긴 것은 다행한 일이다. 심지어는 개그의 내용과 타이밍도 메모하곤 한다.    

 

   나쁜 본성을 숨기려 애쓰느라 착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제법 성공적이고.

    자리 양보하기나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문 잡아주기, 노약자와 여성의 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아 부축하고, 파지 줍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주고 여러 성금 또는 후원이 필요한 곳에 굳이 익명으로 적은 기부를 하는 등의 것.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수준의 기본기에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 공손한 척, 미소 - ‘썩소’로 보이겠지만 - 응대, 문자와 카톡은 최대한 비문 없이 정성스레, 하고 싶은 쓴소리는 가급적 꾹꾹 누르고, 경청의 덕을 살리려 없는 힘을 쥐어짜며, 보기 싫은 사람 떡 하나 더 준다. 공동 식탁에서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음식에는 젓가락을 내밀지 않고 인기 있어 보이는 음식은 부러 멀리한다. “괜찮습니다.”라는 양보와 겸양 - 인 척하는 - 은 기본 장착. 누구나 다 하는 일일 것이다.   

  

    오래 전, 밤길을 걸었다. 가로등은 드문드문하고 길 한편으로 차들이 길게 주차된 어두운 길이었다. 무슨 생각인가를 하며 ‘구 씨’처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로 옆의 차량이 시동을 걸었다. 깜짝 놀랐다. 온몸의 터럭이 곤두서는 느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지방에 다녀오다 동행을 내려주고 잠깐 차에서 잠이 들었다. 어느새 밤. 사위는 어두운데 덜컥 겁이 났다. 시동을 걸고 라이트를 켜니 정염에 빠져있던 저만치 앞의 젊은 연인이 혼비백산. 불 꺼진 가로등이 외로운 골목길의 전신주 아래는 종종 갈 길 멀고 짧은 이별이 아쉬운 연인들의 공간이건만 내가 틈입해 버린 셈이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나서는 차의 시동을 걸 때면 가까운 곳에 누가 있지는 않은지 늘 주위를 살핀다. 누군가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지나칠 때까지, 젊은 연인의 상황이라면 정염의 불꽃이 사그러들 때까지 참는다.     


    예나 지금이나 택시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요새는 앱으로 택시를 부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 시스템 탓인지 길거리에 서서 손들고 택시 잡는 것은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역시 오래전, 앱 따위는 없던 선사시대. 짐이 있어 급하게 택시를 잡는데 정말 유난히 안 잡혔다. 한참을 손을 흔들며 섰는데 택시 한 대가 30미터쯤 앞에 서고 손님이 내렸다. “택시~” 부르며 짐을 챙겨 뛰어가는데 야속한 택시는 길을 떠났다. 더 야속한 것은 조금 앞으로 가서 다른 손님을 태운 것이었다. 분명히 ‘신인 손님’이었다.

그 이후로 택시를 타면 내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기 100미터쯤 전부터 손 흔드는 사람이 있는지 본다. 있으면 그 앞에서 내린다. 나는 다 왔으니 됐고, 기사님은 빈 시간 없이 손님 태우니 좋고, 손님은 반가울 테니 좋고. 가끔은 손님에게서 고맙다는 ‘터무니없는’ 인사를 받아 괜히 기분이 좋을 때도 생긴다. 물론 아주 가끔, 드물게.


    이렇게 온갖 것에 잔신경을 쓰며  산다.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배려하고 조심하고 알게 모르게 속을 끓이며.     


    그래본들 뭐하나 싶은 때가 있다. 정작 서로 그런 속을 알아주고 토닥토닥 챙겨주고 고마워해야 할 주위의 가까운 - 혼자 생각일지 모른다 - 사람들이 오히려 차갑고 무섭고 정말 남보다 더 심한 남 같이 대할 때가 그때이다. 

    뭐 특별한 것을 해 달라는 것도 아닌데, 그저 ‘아 그렇지’, 알은 체를 안 하고 속으로 헤아리기만 해도 된다. 우리끼리 얼음장처럼 냉정하게 포청천놀이 안 해도 우리끼리는 안다. 그리고 또 알아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마음을 쓰지 않나? 물론 그렇지 않은 청맹과니들도 분명 있지만.

    더욱 아픈 것은 자기의 판단만으로 ‘입 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 충언이고 조언이며 충고라고 한다. 가까운 사이이기에 충심으로 한단다. 충언은 역이이고 조언은 귀찮으며 가장 좋은 충고는 충고하지 않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농담이 있다. 그 배경에는 ‘청하지 않은’과 ‘들여다보지 않고’, ‘라떼는 말이야’라는 조건이 작용한다.  

   

    차라리 조심도 말고 배려 따위 없이 성악의 본성대로 살아보면 어떨까. 마음이라도 편해지려나. 그럴 자신 없으면 ‘인생은 독고다이’ 외치며 침잠이라도 해야 하나? 

    어울려 산다는 거,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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