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치혜 Aug 24. 2022

라면을 먹으며 장모님을 떠올리다

20220824.

다섯 시가 좀 못 되어 눈을 떴습니다. 푹 자려고 모든 알람을 꺼놓았고, 844 킬로미터의 장거리 왕복으로 아니, 지난 금요일부터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신경이 초집중되며 쌓였던 피로는 이미 도를 넘었기에 숙면의 조건은 충분했습니다. 목과 어깨는 뻐근했고 눈은 아렸습니다. 다시 누웠습니다. 그리고 곧 일어났습니다. 잠은 마치 바닥에 떨어져 흩어져버린 수십 개의 작은 구슬들처럼 이미 멀찍이 달아났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들어온 수 백통의 문자와 카톡을 비로소 찬찬히 읽었습니다. 은행 앱을 열어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그 옆에 찍힌 숫자를 확인했습니다. 답장을 해야 할 사람들과 인사를 해야 할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구분하여 셈했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장모님을 여의느라, 그리고  멀리 모시는 길에 운전하다 졸음이 쏟아질까 염려되어 평소 양의 반의 반도 안되게 먹은 때문이겠지요. 진라면 매운맛을 끓였습니다. 5일 만에 입에서 땡기는 음식이 라면이라니, 참 내.

   후후~ 라면을 먹으며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으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다가 몇 해 전 페북에 올렸던 글이 연결되었습니다. 이른바 과거의 오늘.

신기하게도 장모님의 이야기였습니다, 하필, 장례를 마치고 선영에 모셔드린 다음 날인 오늘. 신기는 무슨 신기이겠습니까. 몇 년을 앓으시는 어른이 계신 자식들이라면 마음 한 구석에 늘 같은 생각이 깔려 있어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날이 이어지곤 하는데요.

   장모님을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던 날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후로 장모님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 하셨습니다. 코로나19라는 대역병으로 그 몇 년의 기간은 피폐했습니다. 그리고 장모님께서는 3일 전, 마침내 육신의 고통을 털어내시고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지난 금요일, 마지막으로 장모님을 병원에서 뵌 날, 앙상한 손과 팔을 잡아드렸습니다. 차마 부서질까 두려워 제 손에 작은 병아리를 잡을 만큼의 힘도 넣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아리도록 차갑던 그 손이 떠올랐습니다. 산소마스크에 의지해 힘겹게 숨을 몰아쉬시던 장모님의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눈물이 고였습니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심신이 지친 아내는 잠을 자고 딸은 제 방에서 제  엄마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합니다. 늙은 사위는 라면을 먹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여러 순간 여러 곳에서 우리는 장모님을 아프게 기억하겠지요. 그리고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담담히 추억할 것입니다.

  장모님을 보내드리고  첫 날, 오늘은 이렇게 기억합니다.



"잊어간다는 것"

                              이치혜(異癡慧)


  장흥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불편한 침묵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운전에만 집중하는 척하면서 백미러로 장모님을 흘낏거렸고 옆자리의 처남은 심란한 표정으로 창밖에 시선을 던졌습니다. 뒷좌석의 처조카는 가벼운 멀미 탓으로 차창을 조금 내린 채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있었고 그 옆에서 장모님께서는 주무시는 듯 눈을 감고 시트 깊숙이 몸을 파묻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작은 이 서방."

  "네 어머님."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자네 아편은 끊으셨는가?“

  "..."

  처남의 얼굴에 옅은 한숨처럼 미안한 웃음이 흘렀습니다.

  "네. 벌써 끊었습니다. 염려 마세요"

  "잘하셨네. 그런데 이 서방은 올해 몇 살이신가? 나는 벌써 서른 다섯이나 됐는데."

  코끝이 아려왔습니다. '우리 장모님이 왜 이렇게 되셨지...'

  피곤하신지 장모님께서는 다시 눈을 감으셨고 우리도 따라서 입을 닫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장모님을 장흥의 한 요양원으로 모시는 길이었습니다.


  몇 주 전 동서의 연락으로 처가의 삼 남매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몇 달 전부터 장모님께 치매가 온 것 같아 얼마 전 검사를 받았고 아직 결과는 안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부쩍 진행이 빨라져서 폭력성을 보이시고 섬망, 환청 등의 증상까지도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낮에는 온 가족이 직장이며 학교에 가야 하는 상황. 장모님 홀로 집에 계시는 그 시간 동안 몇 차례 발생했던 작은 사고의 경험담과, 그로 인해 머리 한편에 자리 잡은 치명적이고 불안한 상상에 대한 동서와 처형의 이야기를 무겁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뒤에는 차마 죄송스럽고 조심스러워 선뜻 입을 뗄 수 없고 오히려 그래서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고단함과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때로 혹은 너무나 자주 우리의 삶은 이성과 지각에게 결심을 강요합니다. 내가 내린 결론으로 늘상 마음 아파하면서도 현실이 요구하는 질문과 어쩔 수 없음 때문에 누군가를 힘겨워하고 가리기도 합니다. 오십을 훌쩍 넘긴 자식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게 자식으로서 할 짓인지를 두고 얘기했습니다. 장모님께서 강요받은 결심의 측은한 대상이 되시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렇게 하는 편이 장모님께서 지내시기에도 훨씬 낫겠다는 생각에 요양원으로 모실 것을 의논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쾌적한 곳, 창 밖의 풍경이라도 더 좋은 곳을 찾아 모시자는 것으로 서로의 미안한 마음을 달래고, 죄책감은 그보다 더 깊숙이 숨겼습니다.


  차 안의 풍경이 그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날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재작년에 허리가 편찮으신 장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다녔습니다. 친구에게서 잘 본다는 의사를 소개받아 매주 한 번씩 다니며 봄부터 가을까지를 보냈습니다. 눈에 띄는 차도가 없이 편찮으신 모습을 보면서, 그것 때문에 조급해하시는 장모님의 모습을 뵈면서 속이 많이 상했고, 오고 가는 차 안에서 어색한 침묵도 꽤 흘렸습니다.

  스물 몇 차례 진료받은 날 의사 선생님이 3주 후에 오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즈음 몇 주 동안은 비교적 편안해 보이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선지 장모님도 저도 살짝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장모님께서는 두런두런 옛이야기들을 꺼내셨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안동 권씨 엄한 집에서 자라 우여곡절 끝에 오라버님의 도움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산에 유학했던 시절의 이야기. 남해 수재 소리 듣던 장인을 만나 삼 남매 키우던 이야기. 느티나무 같고 파란 하늘 같던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내고 약한 내색 없이 꼿꼿이 살아온 이야기. 남편 대신 시댁 조카들 서울로 불러올려 번듯하게 서울 유학 뒷바라지했던 보람. 마찬가지로 당신의 세 남매 바르게 키워낸 어미로서의 자부심 등. 그동안 몇 차례 들었던 이야기였고 제가 장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만든 이야기들을 그 날따라 살짝 눈가를 붉히시면서 찬찬히 이어가셨습니다.

  이야기 말미에 장모님께서는 치매에 대한 두려움을 눈물겹게 드러내셨습니다. 장모님 친정 식구들께는 치매 가족력이 있어서 언젠가는 당신께도 그것이 찾아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최대한 버티기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전국의 산 이름을 외우고 인도의 19X19단을 공책에 쓰신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이 서방. 나는 자네 장인 떠나보내면서 긴 병수발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 줄 아네. 더욱이 치매라는 병은 가장 고약한 병이라서 환자 자신이 추해지는 걸 모르지. 내게 치매가 오면 상의해서 요양시설로 보내 주시게. 아이들한테 추한 모습이 기억되지 않게끔."

  대답 대신 3주 동안 별일 없이 편안히 지내시라고, 혹시 불편하시면 전화 주시라고 말씀드리며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려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아침에 딸애한테 받은 빼빼로 한 갑을 드렸습니다.

  "어머니 오늘 무슨 날인 줄 아세요?“

  "알지~ 난생 처음 받아보네. 고맙네~"

  장모님은 조그맣고 뽀얗게 웃으셨습니다.


  인생이 파란만장하지 않은 이 땅의 어머님들이 한 분이라도 계실까마는 장모님의 성정과 현명하심을 늘 존경하고 감탄해 왔는데 마침내 당신께서 가장 우려하시던 일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빨리...


  장모님을 요양원에 남겨두고 일어서야 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어머님, 마음 편히 잡숫고 계세요. 자주 뵈러 올게요."

  "이 서방. 나 집에 가야겠어. 나 좀 집으로 데려가 주시게."

  "어머니. 오늘은 안돼요. 일단 여기에 며칠 계시다가 도저히 불편해서 안 되시겠거든 그때 말씀하세요. 그럼 모셔 갈게요."

   "아니야. 나 집에 가야겠어."

   처남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님. 손자들 공부에 방해 안 하시겠다고 오시기로 결심하셨잖아요.“

   "아이들은?"

   "네. 다 학교 갔습니다."

   장모님께서는 부스럭 부스럭 손가방을 뒤지시더니 작은 사탕 몇 개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알겠네. 애들 갖다 먹이게. 자네들도 하나씩 먹고."

   어미에게 가족과 떨어져 요양원에 계시라는 쉰 살 넘은 자식들을 챙기시고 손주 안부를 묻는 장모님. 처조카는 소리도 없이, 닦을 겨를도 없이 그저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분을 뒤로 하고, 장흥으로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침묵 속에 장흥을 떠나왔습니다.


  치매. 어리석을 치(癡)어리석을 매(呆)라고 씁니다.

  꿈과 희망과 즐거움과 비탄이 한데 섞입니다. 살면서 이루어 왔던 많은 것들을 안개처럼 뿌연 기억의 저편으로 하나씩 둘씩 밀어 넣으며 잊어가고 잊혀져 갑니다.

  저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다짐과 약속을 할까요? 집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배운 여러 가지 것들을 잘 지키겠노라, 잘 이루어 보겠노라 무수히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 많은 것 중에 지켜낸 것은 얼마나 될지, 그렇게 하지 못해 마음속에 안타까움이 쌓인 것은 그것들의 몇 배나 될까요? 심지어 이런저런 핑계 속에 몸을 숨긴 채 그러한 안타까움 마저 까맣게 잊고 사는 저야말로 치매가 아닐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모님. 볕 좋은 날 어머님 모시고 장인어른 누워 계신 남해로 나들이 가자는 약속을 이제는 지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창 너머에서 저희를 지켜 보고 계시겠지요. 평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기억들로만 어머님의 인생을 추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헤어짐을 준비하는 허둥지둥이의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