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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Jan 01. 2023

0310 - 0820 - 1030 - 1211.  

2022년 기억.

    밤공기가 "쨍"소리라도 날 듯 차다. 반달은 높이 밝다. 어김없이 찾아온 한 해의 마지막 날.

    이상하게도 마음이 쫓기지 않는다. 마무리를 잘해서는 결코 아니다. 아직도 할 일이야 지천이지만 뭐랄까, 늘어진 옷소매 같은 느낌이다. 혹은 한껏 팽팽했다가 '어차피 많은 날 중의 하룬데 뭐' 하는 셀프 달관의 경지 또는 현타에 빠져 맥 놓은 기분 탓인가. 오늘은 토요일이고 내일은 일요일, 모레는 월요일로 같은 일상이 이어질 것을 생각하니 그럴 법도 하겠다.

    그래도 2022년의 끝날. 며칠 전부터 별러온 나의 1년을 돌아보자...했는데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 한 일 내일 또 하는 그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흠, 바쁘긴 엄청 바빴는데. 일상의 퇴적이란 본질적으로 생활의 과정에 불과한 것으로 잊힐 흔적으로만 남는 것이다. 나의 시간에, 삶에 새겨질 인장들은 결국 내가 치열해야 얻어지는 것일 텐데 어김없이 또 한 해를 그저 그렇게 보내버린 것이다.

    쓸모없는 반성 따위 그만!  지난 1년 중 며칠은 기억해 보기로 한다. 제목의 숫자가 신용카드번호 열여섯 자리는 아니다.


   0310, 慾俗世絶緣 然而 差不多失敗.

   도무지 납득 안 되는 선택에 아연실색. 1987년에 버금가거나 더한 놀라움이었다. 속세의 소식을 끊고 오직 OTT며 유튜브 따위로 오락과 풍류를 벗 삼아 세월을 보내려 하였으나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하였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를 화두로 삼고 있으나 뜬금없는 우국충정으로 심려가 깊다 하겠다. 정반합과 이성의 힘을 믿으며, 그래도 시간은 간다. 보라. 어언 연말이 아닌가.


    0820, 권리와 의무의 박탈.

    장모님을 여의었다.

    이제 정말 잘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금만 더 계시면 세상의 흔한 즐거움으로 하하 호호하시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글로써 엮어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속절없게 되었다.

    아쉬움만 가득한 쓸쓸한 이별. 거실에 놓인 액자로 가끔 장모님과의 많지 않았던 시간을 추억할 뿐이다. 지키지 못한 권리와 의무는 손 밖에서 더욱 또렷한 법이다.


    1030. 還甲이라 쓰고 換腸이라 읽다.

    어느새 새로 갑자를 시작하게 되었다. 환장할 노릇.

    시간은 살 같고 재생, 재활은 눈에 띄게 더디다. 크로노스의 잽싼 발걸음이라니. 입 밖에 나온 말과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유이한 것이라고 한다. 남은 시간이 더 큰 아쉬움으로만 남지 않도록 애쓰자는 것을 다.짐.만. 해보다 해의 마지막 날을 마.침.내. 맞는다.

    행복스럽게도 내년부터 만 나이가 표준이라고 하니 1년 꽁으로 젊어지려나 보다, 하하하~

    

    "규정(閨情)"  이옥봉


    약속해 놓고

    왜 아니 오시나요


    뜨락의 매화

    꽃이 지려 합니다


    문득 나뭇가지

    소스라친 까치소리


    부질없이 거울 속에

    눈썹만 그립니다.


    주제는 다르건만 속절없는 야속한 마음은 같아 인용해 본다.


    1211. 過分荷重. 거룩荷重.

    예수님 믿는다 나선 지 채 20년도 못 채웠는데 분에 넘치는 직을 받았다. 자긍과 감사보다는 걱정만 앞서 어리둥절한 채 해를 보낸다.

    이왕이면 태평성대에 맡겨주시지. 어리석은 구시렁은 부질없다. 다른 이들 눈치 보며 근신하고 근심하자. 다만 하나라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지금 감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10년 후 온전한 은퇴를 맞이할 때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謹啓時下 謹賀新年~~


https://youtu.be/mo_AZsGMH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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