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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May 17. 2023

혼자 왔니?

과 친구들과 단톡방에서 수다(^^) 떨다가 한 친구가 몇 년 전 명지산에서 길잃고 고생했던 경험담을 풀었습니다. 그 이야기에 덧대 농담 하나 끄적거렸습니다. 더운 날에 소소한 파적거리라도 될까 하여.

 

 

    6월의 날씨로는 지나치게 더웠다. 배낭을 챙기면서 생수통 하나를 빠뜨린 탓에 물은 두 모금 마실 정도밖에 안 남았다. 욕심을 내서 페이스를 끌어올린 데다가 하산길 중간에 길을 잃어 피곤함과 허기가 심해졌다. 명지산은 생각보다 깊었다. 남은 산길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석은 이러다 당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참을 길의 흔적을 찾으며 주섬주섬 내려오는데 저만치에 작은 방울만 한 빨간 열매들이 초록잎 사이 사이에 몰려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석은 발길을 향했다. 산딸기 군락이었다. 

    허겁지겁 산딸기로 허기와 갈증을 면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등산로가 보였다. 안내판에는 남은 거리가 4킬로미터 남짓이었다. 갑자기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긴장이 풀리며 굳어있던 근육들이 한꺼번에 이완되는가 보았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석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6월의 해는 제법 길었다. 남은 거리를 감안하면 잠깐 눈을 붙여도 되겠다 싶었다. 오른편에 나즈막하니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바위 위로 소나무 그늘이 제법 늘어져 햇살을 피할만했다. 배낭을 베개 삼고 모자를 얼굴에 덮고 누웠다. 석은 이내 혼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잔 것일까.

    석은 가벼운 인기척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누군가 그의 몸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것 같았다. 미끄러지듯 혹은 살짝 누르듯, 맴도는 것 같기도 하고 왼쪽, 오른쪽 규칙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정체 모를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나른해지고, 살짝살짝 쑥스러운 쾌감의 잔물결이 온몸을 간지럽히는 것이 즐길만했다.

    '가만. 이거 혹시 산짐승 아니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석은 덜컥 겁이 났다. 그러니 눈을 뜨는 것도, 몸을 뒤척이는 것도 무서워져서 몸이 일순 굳어졌다.

    '아니야. 꿈일지도 몰라. 가위의 일종일 거야'

    조금 전의 야릇한 느낌도 실재였는지 불분명했다.

    석은 용기를 내어 눈을 살짝 떴다. 

    헉! 그의 왼편에 긴 생머리의 여자가 가냘픈 실루엣의 나체로 그에게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몸을 살짝 만지다가는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손을 모으고 뭔가를 했다. 그러다가는 이상한 신음소리 같은 걸 뱉다가는 다시 그를 만지고 더듬는 행동을 반복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이 산속에 나체의 여인이라니. 지금 내가 겁탈당하는 건가? 산짐승은 아니라 다행이지만 진짜 무슨 구미호나 처녀귀신인가? 어쩐다...'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읽었던 아랑전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석은 고민에 빠진 채 취할 수 있는 액션을 그려 보았다. 

    '저 여자의 정체가 불분명하니 일단 떼어내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 만일 귀신이면 운명에 맡겨야 하지만 사람이라면 시간을 벌어야지. 여자가 사타구니를 만질 때 번개같이 왼발로 여자의 등을 밀어내고, 그 반동으로 우편구르기를 하자. 탄력으로 일어나면서 왼무릎을 앞으로 전진무의탁 자세를 취하면 사태 파악과 공격 혹은 방어의 기회가 있을 거다. 혹시라도 저 여자가 진심이고 무엇인가 사연을 간직했다면 다른 전개도 가능할 거고 그럼 손해볼 일은 아닐 거야. 우선은 적절한 타이밍에 저 여자를 걷어내야 해. 자. 하나, 둘, 셋!'

    석이 심호흡을 하며 왼발을 들려는 순간 그녀가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아아악!"

    그 얼굴을 본 석은 길게 비명을 질렀다.

    "이제 깼어? 혼자 왔니?"

    아이보리색 등산복에 선글라스를 쓴 김태원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석에게 물었다.

    "이런 데서 함부로 자면 안 돼. 자 커피 한 잔 마셔."

    태원씨는 자신의 무릎 앞에 놓인 배낭에서 캔커피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새 해가 제법 뉘엿해져 볕은 날카롭지 않았다.

https://youtu.be/krOMSqcJB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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