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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치혜 Aug 13. 2023

구우일모(九友溢慕)

    책상 서랍을 정리했다. 기억 속에서조차 잊힌 오래된 다이어리와 전화번호수첩과 동문회 주소록이 나왔다. 또박또박 이름과 011, 016, 017 따위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적은 볼펜 글씨는 긴 세월 동안 조금씩 조금씩 잉크가 번져 볼펜 글씨 특유의 선명함이 바래있었다. 프린터로 출력하여 철한 주소록은 앞장과 뒷장이 잉크가 눌어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 장씩 넘기며 이름과 주소와 근무처를 읽었다. 그 다이어리와 전화번호부 수첩을 적어 넣을 때의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설핏 떠오르곤 했다. 아련했다.     

   벗이 여덟 있다. 

   20세기의 1982년, 1983년에 동기로 선후배로 인연이 비롯되어 21세기의 오늘에 이르렀으니 40여 년이 흘렀다. 반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한 해, 두 해 차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벗이다.

   뜻한 대로 살아온 이도 있고 제 뜻과는 영 동떨어진 삶의 길을 걸어온 이도 있다. 젊었던 날에는 그때대로, 장년의 날에는 그 세월의 묶음만큼 바빴다. 각자의 인연과 시간이 얽혀 당연하게도 40년의 세월을 빼곡하고 촘촘하게 채우지는 못 하였다. 


   그래도 서로 추억하고 그리워하였으리라. 

   마침내 2020년 11월에, 거의 14~15년 만에 선배 한 분과 동기 친구들이 모였다. 그 뒤로 가끔씩 등산도 하고 술잔도 나누다가 올해 3월에 한 해 동문 후배님들도 함께 모이게 되었다. 회장과 총무를 기꺼이 맡아준 이들 덕분에 화기애애하고 수다스러운 단톡방이 왁자하다. 한 달에 한 번 산행하고 탁주로 목을 축이기로 하여 덕분에 몇 차례 심신을 '과하게' 단련한 바 있다. 그중 몇은 양양이며 군산이며 원족을 나가 나 같은 이의 부러움을 소환하였다.   

  

   아홉 명이 모였는데 여느 모임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자고로 우리나라는 김, 이, 박 세 성씨가 전 인구의 45 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는데 이 모임에는 김 씨가 없고 이 씨만 두 명으로 중첩될 뿐 각양각姓이다. 박, 신, 유, 이, 이, 장, 정, 조, 최 되시겠다. 하여, 혈연을 기반으로 차기 대권을 도모하는 일은 없으리로되 합종과 연횡은 기대해 볼 만하리라.   

   

   모임의 이름은 "몽떼(Monter, 오르다)"라 명명하였으나 명실상부하게 몽떼를 즐기는 이는 절반이 넘지 않는 것 같다. 다만 montagne 의 정취와 낭만을 공통으로 탐할 뿐이다.   

  

   환갑을 넘었거나 곧 맞는 '아저씨'들임에도 놀랍도록 순(淳)하고 박(朴)하다. 옛적부터 지금까지 육두문자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하는 자는 나 하나뿐일 정도이며, 이제껏 고성으로 흥분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가끔 만나는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20대의 청년 감성과 장년의 넉넉함이 공존하는 ‘순수의 시대’를 만난다.     

 

   우리 또래의 다른 아저씨 중에 몸의 건강을 잃었거나 마음으로 훅 늙어버린 사람들을 종종 본다. 감사하게도 몽떼에는 아직 없다. 비교적 건강하고 그중 몇은 샘이 날 지경으로 건강하다. 

   옛날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해송자(海松子)"라는 글이 실려있었다. 어우당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 나온 글이다. 양반 상전들끼리 술상 위에 떨어진 해송자(잣)를 술안주 삼아 농담을 했다. 그 잣을 심어 나무가 되고, 다시 그 나무에서 잣을 받아 심어 큰 나무가 될 때까지 살겠다며 장수만세 허풍을 떨었다. 옆에서 이를 듣던 목수가 “두 합하(閤下) 만세(萬歲) 후에 소인이 그 나무로 관을 짜드리리다”라고 하여 좌중을 웃겼다는 해학의 이야기이다.

   인명은 재천이라 했고, 흉흉한 사고가 곳곳에 일어나니 천수를 장담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장담컨대 불의의 사고사가 아니라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해송자를 심고 키워 벗의 관을 짜기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기원한다.     


   육십을 살았으니 소신과 주관이 있다. 그렇지만 설명은 하되 강요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맛깔나게 잘 하는데 그보다 듣기를 더 즐긴다.

     

   고민은 하지만 기우에 빠지지 않고, 모색하되 불안에 흔들리지 않는다.

     

   앳된 시절 우리 중에는, 문학도였으나 처음 만난 사람들로 하여금 토목과, 건축과 혹은 축산과 쪽일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추측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소유자들이 있었다. (해당 학과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우리가 단어의 선입견으로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반말을 하기에 어려워보이는 노안의 소유자도 있었다. 밤톨처럼 해사한 소년의 이미지도 있었다. 

   나이를 먹으며 자신의 외모를 책임진다고 했던가. 모두 지금에 잘 어울리는 멋있는 장년이 되었다. 전공의 선입견 따위는 풍화되어 누구나 문학도 같고 누구나 공학도 같아져 근사하다. 노안이었던 이는 지금의 나이에 어울리는 얼굴을 갖추었고 어리게 보이던 이들은 몸피와 듬성한 숱으로 또한 나이에 어울려졌다.      

   청춘의 때에 많은 시간과 사건과 추억을 공유하였다. 덕분에 늘 새록새록하고 늘 젊다. 

   

   짐짓 야하고 문란한 이야기로 단톡방과 술자리를 즐겁게 하는 이들도 있다. 이른바 양기가 입에 몰린 경우이다. 용불용설의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짐작하건대 그들의 몸은 수년 혹은 수십 년 청정하게 보관된 동정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잘 보존하라. 곧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수도 있으리! 

    

   감사하게도 나는 이 벗들 덕분에 지금 내 인생의 한 축을 만들 수 있었다. 과분하게도 이 벗들은 늘 나를 기꺼이 대해주었고 나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아 주었다.

   앞으로 함께하며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누군가는 해송자를 나무로 키우고 그 나무를 켜 관을 짜줄 것이고, 누군가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별의 안타까운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정확할 수 없지만 확정된 길을 걷고 있으니. 

   그때가 언제든 늘 지금 같기를. 지금이 우리의 가장 젊은 때이니 그만큼 찬란하기를. 건강하기를.  

   

   나는 바란다. 이 모든 벗들의 아들, 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기를. 이 모든 벗들의 부모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실 때, 내 젊은 날의 그분들을 떠올리며, 애도하고 추모할 수 있기를. 이 벗들 중 어느 누구도 내 앞에서 먼 길을 떠나지 않기를. 

    

   구우일모(九牛一毛). 본디 뜻은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을 이르나, 아주 희박한 가능성을 비유하는 데서 나왔다. 우리가 만나 40년 혹은 그 이상을 이어온 인연의 확률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아홉 마리가 아니라 구백아흔아홉 마리 소에서 나온 터럭 하나보다 훨씬 귀할 것이다. 

     

   억지를 부려 조어해 본다.

   구우일모(九友溢慕). 아홉 명의 벗이 있어 사모하는 마음이 넘친다. 


https://youtu.be/Hnu53l7brEE?si=hDTuLj6lpaKLvZAN

https://blog.naver.com/uhmmmm/222153354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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