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자받는 며느리 입니다

짠한 스토리

by 중랑천

// 사립 유치원, 사립초등학교, 선화예중, 예고에 음악대학교, 교육 대학원까지 힘들게 뒷바라지해서 공부시켰다. 임용시험에 안되면 사립 중학교 교사로 넣어 주려했다. 시집이라도 잘 가서 편하게 살아보라고.. 내가 아무것도 없이 고생해서 살아왔으니 너희들은 좀 편하게 살았음 했다. 근데 어디 한 교회를 가서 하나님 찾더니 가난한 집 둘째 아들내미를 데리고 와서 꾸역코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내가 가슴이 무너진다. 실망스럽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근데 또 기특하다. 둘이 돈은 안 도와줘도 살아보겠단다. 잘살아봐라. 젊은 패기 둘이 만났으니 그래도 잘 꾸려가며 살겠지. 데려온 김서방은 건실해 보이고 회사도 탄탄하니 그래도 잘 살 거라 믿는다. //


‘아빠~ 내가 마음을 너무 잘 읽었나요?’

아빠가 너무 공들여 키워주셨다. 음악 공부를 하는데 돈이 이렇게 많이 드는 거였는지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다. 음악은 내가 선택했지만 그 뒤에 모든 것은 부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이것은 나에게 ‘가방끈만 길어’라는 아픈 꼬리표이다. 내 나이 40대인 지금도 따라다닌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공부한 게 많은데 아깝지도 않니..’ 자꾸 움츠려든다.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사는 데에도 참 힘든 꼬리표이다. 부모님 기대에 부흥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차라리 음악 말고 다른 걸 공부를 했다면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마음이라도 가볍지 않았을까.. 돈을 많이 써서 공부를 했다는 중압감이 너무 무거웠다.

결혼이라는 마지막 최종 선택에서 아빠를 크게 실망시켰을 거다. 평소 과묵하신 아빠한테 직접 들은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표정에서 눈빛에서 읽을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을 가고 나서 창밖을 보시며 한마디 하셨다고 했다. 동생이 그 얘길 나에게 전했다.

남편을 만나 4년의 연애를 하고 취직하고 일 년이 채 안돼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취직한 지 얼마 안 돼서 모은 돈이 없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근데 정말 없었다. 입사하고 그간 일 년간 받은 월급을 아버지께 드리고 남은 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결혼이야기가 나오자 예비 며느리인 나를 붙잡고 얘기하셨다. 지금 내가 아들 돈 삼천을 하나도 못 모아놨으니 삼천에 대한 이자라도 주겠다. 대출해서 살고 있거라.

이자? 자세한 건 모르겠고 네네..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 말이 귀에 남아 박혔다. ‘아들 돈을 하나도 못 모아 놨다’ 아들 월급을 다 쓰실 정도로 생활이 어려운 집이구나.. 집에 오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신랑이 가져온 학자금대출과 결혼비용으로 사용한 마이너스 통장.. 우린 그렇게 마이너스로 신혼을 시작했다. 더 이상 밑은 없다.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난 이자 받는 며느리가 되었다. 내 계좌로 아버님 성함이 한 달에 한번 찍혔고 그런 이상한 상황이 2년 동안 흘러갔다. 지금 생각하면 보내지 마시라 할걸.. 싶다. 서로 위해줄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인데 좀 남사스러운 경우 아닌가. 그때는 그냥 네네~했다.

지금은 신기하리만치 잘 살고 있다. 차도 있고 집도 있다. 두 아이들과 여행도 자주 다니고 양쪽 집 용돈도 가끔 드린다. 문뜩문뜩 예전 저맘때가 생각나는데 아무것도 없이 참 대범했다. 20대의 어린 솜털 둘이 (지금 보면 너무 어린 청년들이다) 겁도 없었다.

우리는 지금도 열심히 등산 중이다. 높은 산 정상의 목적은 아이들의 독립이다. 오를 때 힘들다 하지 않고 내려올 때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오르락 내리락의 오름 사이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느껴가며 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이다.



‘아빠,.. 아빠도 차비 달랑 들고 낯선 땅 서울에 올라와서 힘들게 일구셨고, 이젠 성공하셨잖아요. 나도 아빠 딸이라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잘살고 있잖아.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의 기대감의 무게에서 아직도 벗어나진 못했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벗어날 수 있게 되면 더 잘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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