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커스를 보러 갔다

사자와 호랑이는 불쌍해 보였다

by hani

어느 날 성수가 단체톡방에 서커스를 보러 가지 않겠냐는 말을 했다. 어릴 때 했던 불타는 고리를 사자를 타고 뛰어넘는 서커스 게임이 떠올랐다. TV에서도 줄을 타고, 공을 타는 서커스를 본 기억이 있다. 추억을 떠올리며 흔쾌히 간다고 했다.


지도에 찾아보니 카이로에 서커스를 하는 곳이 여러 곳 있었고, 그중 가장 유명하다는 The National Circus of Giza를 찾았다. 우리나라는 동춘서커스 정도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집트는 아직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볼거리 중 하나였다.


가격도 상당히 저렴했는데 VIP석이 인당 200 EGP로 원화로 약 6천 원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현지인들도 많이들 보러 왔다. 물론 카드도, 온라인예매도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리를 안내받았을 때는 살짝 당황했었다.

메인 스테이지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자리였는데, 우리는 그중 가장 끝 자리였다. 공연을 보는 내내 옆모습만 보는 자리였는데, 가운데만 보고 공연을 했다. 가운데나 끝이나 왜 가격이 같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자는 역시 이집트답다고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의자의 쿠션 부분은 있는 대로 꺼져 프레임이 느껴질 정도로 얇았고, 얼마 안 앉아있었는데도 엉덩이가 아팠다.

이럴 거면 그냥 플라스틱 의자를 주지.


그리고 직원이 돌아다니며 시도 때도 없이 음료나 간식을 시키라고 말을 걸며 집중을 방해했다.


그래도 공연은 알찬 구성이었다. 저글링 하고, 공을 타고 묘기도 했다. 특히 마술사가 관객을 불러 함께 공연했던 어린이 마술은 인기가 많았다.


처음엔 그냥 뻥 뚫린 공연장이었는데, 동물공연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철창공연장으로 탈바꿈했다. 그 틈을 타 서커스 직원이 아기사자와 뱀을 어깨에 둘러매고 사진촬영을 팔고 있었다.

사진이 입장료보다 비싸서 그냥 사자만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가 제지를 당했다.

다음에 아이랑 오면 찍어줘야지.


마지막은 이 공연의 피날레인 사자 6마리, 호랑이 2마리가 나오는 초대형 공연이었다.

그런데 이 동물들이 등장하는데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위압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연실 하품만 해대며 공연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 보였다. 육중한 몸을 가진 여자조련사가 채찍질을 해대야 겨우 움직이는 정도였다. 등 위에 올라타는 퍼포먼스를 할 때는 사자가 왠지 불쌍해 보였다. 허술하게 만들어진 철창을 뚫고 도망가도 될 텐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한 사자의 표정에서 묘한 애잔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육식동물들을 보고 너무나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각박한 세상에 절여진 어른들보다는 순수한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이라는 걸 내심 깨달았다.


어느 순간 나는 어른이 되어있었지만, 어릴 때는 TV나 게임 속 서커스를 보며 나도 사자 등에 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자와 호랑이는 너무나 불쌍해 보여, 차라리 동물원으로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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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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