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
소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멈춘다. 여기까지 속계(俗界)지만 이 문을 지나면 법계(法界)이다. 일주문을 지나자 사천왕이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본다. 마음 깊이 숨겨둔 행적이 들킨 양 몸이 움츠러든다. 옷깃을 여미고 발소리를 죽이며 경계를 넘는다.
잠시 걸어 들어가자 양쪽 계곡에 다리를 걸친 건물이 버티고 섰다.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는 가운루이다. 그 아래 등운산 자락에서 두 갈래로 내려온 물이 부딪쳤다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유불선으로 분열된 나라를 몸소 겪은 선생은 양쪽으로 나누어진 사찰을 연결하여 하나가 되기를 꿈꾸었다.
왼편 산자락에 아담한 건물 한 채가 동그마니 앉았다. 바깥에서 보면 연수전(延壽殿)은 작은 궁궐 같다. 입구인 만세문(萬歲門)은 솟을삼문으로 가운데 문은 높고 양쪽 옆문은 허리를 굽힌 시종의 모습이다. ‘延壽’와 ‘萬歲’, 이름을 풀자 이 건물이 지어진 의미가 짐작된다.
연수전은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지었다. 보통 원당은 궁궐에 자리를 잡는데, 하필이면 연수전은 부처님을 기리는 영역 한가운데 있다. 하나가 경계를 침입했거나 다른 하나가 끌어안았거나, 분명한 이유가 있을 법도 하다. 토석으로 둘러싼 담장 안에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이 걸음보다 먼저 들어간다.
연수전은 참한 연인을 닮았다. 나무를 짜 맞춘 듯 구축한 기단 위에 사방 세 칸으로 구성된 연수전은 녹색과 푸른색 단청을 사방으로 둘렀다. 처마를 겹으로 길게 내리고 수줍게 고개를 숙인 새색시와 흡사하다. 자태는 예쁘고 단아하지만, 벽과 천장에는 화려한 그림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빛이 바랜 그림들은 나름의 의미를 뿜어내고 있다.
천정에 사는 한 쌍의 용은 아직도 건재하다. 황제를 상징하는 해는 아직 뚜렷한데 고종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다산을 상징하는 연밥은 선명한데 황손은 만날 수 없고,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 한 쌍만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서쪽 벽의 용은 하늘로 올라갔을까. 사연을 알 길 없는 마음은 낡은 흔적 속에서 굴러다니는 이야기를 줍는다.
‘識勝于丹鶴之中(식승우단학지중)’ 붉은 다리를 한 학을 그리며 흥에 겨웠다는 글을 읽으며, 마음이 스르르 풀어진다. 글에서 그림으로 옮겨 다니며 흥겨움에 취한다. 작가가 누린 마음의 황홀경은 나보다 더 깊을 것이다. 어떠한 경계도 없는 장인의 작품에서는 한 편의 드라마를 본다.
華表千年鶴頂丹(화표천년학정단), 학 정수리의 붉음은 천 년 동안 변함이 없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귀이다. 연수전이 그토록 단심으로 기원했건만, 지금은 왕도 비도 그토록 호화로운 영화도 없다. 화려한 그림만 남아 허허로운 세월을 말해줄 뿐이다.
연수전을 둘러보고 나서야 호기심이 풀린다. 여기에는 감당하기에 힘겨운 시련을 피하려는 노력이 숨어있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왕실과 손을 잡아야 했던 것이다. 연수전은 생존을 담보한 보험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보면 고운사의 처지와 경계의 삶을 살아온 백성들의 모습이 닮았다.
고운사는 백성의 삶도 끌어안았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몇 달밖에 버틸 수 없었다. 삶의 허기에 허리가 휘는데도 각종 부역에 시달렸다. 어떻게 하든 견뎌야 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에 화공은 태평성대일 때 나온다는 상서로운 동물인 일각수를 그렸으리라.
죽음에 직면해서야 삶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극한의 대치 상태를 보일 때 상대를 더 깊이 인식한다. 연수전이 사찰의 필요조건이었지만 이제는 대웅보전이 연수전의 울타리가 된다. 칠성각, 삼성각, 용왕각이 사찰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도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이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시지를 준다.
모든 사물은 시공(時空)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된다. 작게 보면 너와 나가 구분되지만 크게 보면 모두 하나의 섭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한 울타리에 들어선 유불선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는 화엄 사상이 고운사에서 꽃 핀 이유를 이제야 안다.
고운사 경내를 걸으며 허공에 떠다니는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일주문을 경계로 속계와 승계가 나뉜다면 새로운 일주문이 생기기 전과 후는 어떻게 달라질까. 지구가 그은 경도나 국경은 없듯이 모든 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다. 유교든 불교든 알고 보면 사람의 마음이 가른 경계가 아닌가.
가운루 아래를 지난 물이 합수하듯, 모든 것은 하나로 모여 다시 흐른다. 경계(境界)를 오가며 나는 내려놓고 받아들임의 미학을 배운다. 마음의 경계(警戒)를 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찰을 나선다. 정반합의 논리가 아니어도, 마음을 열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오늘 깨닫는다.
연수전 그림과 절집 단청이 이제 하나로 보인다. 모든 경계를 끌어안았기에 유불선이 빚어낸 그림이 조화롭다. 선이 유려한 등운산 위로 가을이 하늘 단청을 푸르게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