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불을 뿜던 불의 산, 금성산. 그 열기로 수백 개의 알을 품는다. 수많은 알이 자신을 품어주는 금성산 자락에서 부화의 시간을 기다린다. 수천 년을 기다리고도 포란의 시간도 잊은 채 긴 잠을 자듯 시간이 흐른다. 실존 국가이면서도 역사에 단 몇 줄만 남은 나라이기에 알은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말을 품고 산다.
2,000여 년 전 금성산 자락에 존재한 읍락국가 조문국. 낙동강을 낀 안계평야 덕분에 먹을 것이 넘쳐난다. 금을 의미하는 소문을 국가 이름으로 정할 만큼 많은 금을 캐는 금나라. 그런데도 몇 줄만 남고 사라진 역사만큼이나 조문국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궁금증이 커질수록 몸은 부화를 기다리는 알 주위를 서성인다. 바람이 불어도 알은 어떤 움직임도 없다. 나는 언제 시작할지도 모르는 부화의 시간을 기다린다.
흙을 쌓듯이 삶을 문화를 역사를 쌓는다. 다지고 다진 수천 년의 삶을 누군가에게는 전해야 했기에 둥그스름한 알을 낳는다. 그렇게 수천 년의 시간을 금성산은 품는다. 뜨거운 불을 뿜으며 열정으로 가득 찬 몸으로 수천 년을 무던한 마음으로 알을 품는다.
금성산의 불길을 따라 알이 부화를 기다린다. 알의 주위로 길이 지나고 다른 세계와 경계를 짓는 낮은 울타리가 길을 따라 늘어선다. 알의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숫자가 적힌 작은 명패만이 반만 드러낸 둥근 알을 대신한다. 유한한 인간의 삶을 대신하여 그들은 무엇을 전하려는가. 긴 포란의 시간을 가지면서 후세에 전하려는 것이 궁금하다.
누런 잔디 옷을 입은 알 사이에서 경덕대왕을 만난다. 스스로 허물어진 능을 보수해 달라고 말할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호위무사도 없이 두 명의 문신만을 거느린 채 명패를 달고 긴 시간을 기다린다. 단 위엔 제물도 꽃송이도 없다. 석등에 불도 켜지 않은 채 기다림을 이어 간다. 세 그루의 소나무만이 알의 부화를 기다린다. 지나가는 바람마저 한마디 말없이 지나간다.
알 사이의 작약이 바람에 흔들린다. 포란의 시간 중인 알처럼 작약꽃이 피기 이르다. 모든 것은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작약을 보니 몸통도 붉다. 붉은 꽃은 아무나 피우는 게 아닌가 보다. 피기 전부터 저토록 몸을 달구며 붉은빛을 띠어야만 붉은 꽃을 피운다. 몸속에 붉은 열기를 가득 품고서야 함박꽃을 피운다. 지난날의 금성산처럼 열기 품은 붉은 기운을 바람 부는 날에도 뿜어낸다.
빨강, 가장 원초적이고 우월한 색. 그래서 어디에 자리하나 금방 눈에 들어오는 빨강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치는 날에도 온몸으로 견디며 살아있다는 강렬한 몸부림을 빨강으로 보여준다. 금성산의 열기를 몸에 받고 삶의 강한 의지가 저렇듯 검붉은 빨강으로 스며 나온다. 그 붉음이 있기에 바람 부는 이른 봄에도 살아 있다는 생명력을 느낀다.
경덕대왕은 붉게 꽃 핀 작약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강대국이 즐비한 시대에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웃음소리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나라에 어려움이 닥칠 때나 힘든 결정을 할 때도 붉은 작약을 보며 힘을 얻었으리라. 붉게 물든 작약꽃을 가만히 바라보며 가슴에 불덩이 하나를 심었으리니.
열기 넘치는 불의 산자락에 터를 잡고 수백 개의 알을 낳는 것은 오래도록 나라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을. 알을 낳고 품고 깨고 나오는 일은 종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한 방편이다. 고대 조문국의 알도 그러하다. 그들이 남긴 한 발 앞선 찬란한 문화를 알 속에 담는다. 받아들이고 더하여 새롭게 하고 배려하는 그들의 문화는 우리 시대에도 필요한 문화가 아닐까. 조문국이 알을 깨고 나올 때 한민족의 문화는 새로움을 더하리니.
금을 제련하고 신기술인 철기를 만들고 뛰어난 농업기술에 넓은 안계평야를 가진 조문국 사람들. 금귀걸이를 받아들여 세공 기술을 더해 아주 작은 금구슬을 점점이 붙였다. 왕관을 받아들여 꼰 모양의 기술을 더한 조문국의 왕관을 만들었다. 독특한 양식의 의성 토기를 만들어 조문국을 각인시키며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묘제도 바꾸었다. 다름을 더해 새로움을 찾는 조문국 사람들의 유전인자를 알 속에 담는다.
꽃을 피우는 것은 모으는 일이다. 그가 만드는 달콤한 꿀이 필요하거나 그가 피우는 문화의 향기에 취하거나 그가 피운 꽃의 아름다움을 보고 모여든다. 모여든 것이 다시 새로운 꽃을 피우고 핀 것은 진다. 꽃이 지며 열매를 맺는다. 조문국의 열매는 받아들이고 더하여 새로워진 열매다. 그러하기에 새로운 유전자를 간직한 알의 부화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기다린다.
붉은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을 붉게 물들이는 작약. 작약은 자신이 지나온 삶의 이력을 고스란히 몸에 새긴다. 붉은 꽃을 피우기 위해 지나온 과정 자체도 붉게 물들이며 불같은 삶을 산 작약은 조문국 사람들, 바로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불의 산에 자리를 잡고 매일 같이 끓어오르는 산을 보면서 온몸을 붉게 물들이며 자신을 닮은 꽃을 피운다.
조문국 사람들은 김 씨를 적극적으로 품어 신라 왕으로 부화시킨다. 이후 줄곧 왕비를 배출하여 신라의 주류를 형성하며 강성한 신라를 만든다. 나라는 빼앗겼지만, 신라인으로 살아가며 삶을 이어간다. 그들은 신라 속에서도 자신들을 닮은 알을 낳는다. 불의 산은 수천 년 동안 온기로 알을 품는다. 긴 시간 공을 들이는 것은 식지 않는 믿음 때문이리라. 자신이 낳은 조문국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전히 뜨겁다.
잇는 것은 중요하다. 잇는 것에서 정체성이 생긴다. 수천 년을 잇는 역사가 중요한 것은 어제가 없이 오늘이 없듯이 지난 역사의 토대 위에 우리의 오늘이 있음이다. 대한민국 고대사가 알 속에서 꿈틀거린다. 이음을 위해 조문국의 유전자가 알 속에서 여문다. 종의 영속성도 문화의 영속성도 알에서 시작한다.
알을 깨는 것은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이다. 낡고 칙칙한 틀을 깨고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사물을 본다. 이렇게 달리 봄으로써 세상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작은 걸음들이 모여 세상은 바뀌고, 바뀐 세상은 다시 누군가 틀을 깨 주기를 바라며 다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작약이 수천 번을 잠에서 깨어나면 조문국도 알에서 깨어나리라. 긴 시간 화산의 붉은 기운을 품어 알에서 깨어나는 날, 조문국을 다시 볼 것이고 한국의 고대사는 작약 닮은 함박꽃이 피어날 것이다. 붉은 기운 가득한 찬란한 문화의 꽃이 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