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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인 Oct 24. 2024

돌아보면

비었다는 것

  허전하다. 불 켜진 가로등 아래 쓰레기봉투를 보니 버려졌다는 게 실감이 난다. 바닥도 공기도 차갑다. 퇴근이 늦은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휑하니 집으로 간다. 찬 바람이 골목을 배회하고 인적이 점점 뜸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몸이 자꾸 움츠러든다. 

  한 사내가 나를 주워 간다. 머리카락과 수염은 마구잡이로 자랐고, 옷이 남루하다. 지하도 한쪽 구석에 익숙한 손놀림으로 나를 눕힌다. 사내는 나를 바닥에 깔고 몸을 눕히고 덮는다. 찬 바람은 허술한 곳으로 스며든다. 사내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사내는 자신을 스스로 버렸을까. 아니면 알맹이만 빼고 버려졌을까. 경기가 나빠져 사람들은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고, 단란하던 가정마저 깨어지고 거리로 내몰린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그나마 비를 피할 수 있는 지하도에 머문다.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마른풀처럼 떠도는 그를 반기는 이도 없다. 노숙자를 데려갈 사람은 없어도 나를 주워 갈 사람은 있다고 자신을 다독거린다. 

 할머니가 나를 주워 손수레에 싣는다. 다시 느린 걸음으로 동네를 돈다. 슈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할머니를 위한 아저씨의 마음을 싣는다. 옆 동네까지 걸음이 이어지고, 길에서 쇠꼬챙이와 깡통을 줍는다. 그렇게 할머니는 골목을 누빈다. 고물이 높이 쌓일수록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의 몸이 새우처럼 휜다.

  고물상에는 버려진 것들이 모여든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물이 모여 있다. 누군가의 구멍 뚫린 바지는 큰 박스에 담겨 있고, 거리를 누볐을 타이어 빠진 자전거가 피곤한 몸을 쉬고, 옆에는 다른 물건을 담았을 박스가 층층이 언덕을 이루고, 책은 책대로 쌓여 있다. 모여든 손수레는 고물을 쏟아 내고, 집게 차는 물건을 집어서 쌓는다. 

  할머니의 손수레가 저울 위에 오른다. 하루 노동의 무게가 숫자로 나타난다. 돈으로 환산하면 삼천 원이다.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언덕을 몇 개 넘고 수 만 걸음을 걸으며 거리를 뒤진 하루의 몫이다. 하루는 감당 못 할 만큼 무겁고 손에 쥐는 숫자는 가볍다. 

  할머니는 폐지를 아무리 주워도 삶이 가벼워지지 않는다. 가벼운 폐지를 한 장 한 장 쌓으면 무거워지고 할머니는 무거운 손수레를 끌어야 한다. 손수레에 폐지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한다. 천 원짜리를 받아 쥐어도 손수레를 비워도 할머니의 일상은 반복되고 삶은 가벼워지지 않는다.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고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늘어가는 것을 몸으로 느낄 뿐이다.

  버려져 본 것들은 안다. 겨울 밤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를, 비었다는 이유로 무시당한다는 것을, 가지지 못한 자의 삶이 고되다는 것을, 몸도 마음도 무거워지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친구를 만나고, 한잔의 커피를 마시고, 가족과 함께 먹고 자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할머니와 노숙자, 둘 다 비어 있다. 비었다는 것, 도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수행이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가난이다. 가난은 몇 달을 미룬 외식을 못 하는 것이고, 학자금을 빌리는 것이고,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렸다고 얼버무리는 것이고, 뒤축이 다 닳은 아이의 신발을 모른 척하는 것이다. 가난은 사람을 비루하게 하고 존엄성마저 빼앗는다. 

  나는 버려지기 위하여 만들어진다. 속을 비우고 나면 어김없이 구겨지고 버려진다. 찢어지고 발에 차이고 길바닥에 나뒹굴고 비에 젖는다. 온갖 수난을 겪지만 힘들다고 하소연하거나 화내지도 않는다. 고물상에 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약속받은 것이다. 사람들은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구하나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비루하고 천박하다거나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 정해진 운명이기에 한마디 불평 없이 따른다.

  나의 속은 빈 날이 많다. 비어 있기에 뚱뚱하지 않고 가짐으로써 갖는 마음의 부담도 없다. 사람들이 버리지 못하여 갖는 비만으로 고민하고, 돈 때문에 다투는 일이 나에게는 없다. 부족하고 모자람을 채워 주는 마음 따뜻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것이 비움의 의미이다. 차고 넘치는 순간 사람들의 관심을 잃고 마음은 무거워진다.

  세한도의 여백의 미가 살아 있다. 군더더기 없는 집과 나무는 여백이 있기에 살아난다. 비우면 공간이 생기고 여유가 넘친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여백과 본질의 어울림이 빈 들판에 눈 내리는 풍경처럼 편안하다. 비움과 채움이 자리에 없는 듯 앉아 있다. 그러나 이는 넉넉한 사람들의 낭만일 뿐이다.

  채우다와 비우다. 삶은 채움과 비움의 연속이다. 주머니를 채우고 욕심을 채우지만 삶은 자꾸 비어 간다. 삶의 대부분을 두 동사로 살면서도 같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은 어렵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면 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한쪽이 채워지면 다른 쪽은 더 비워진다. 시소에서 균형을 이룬 삶은 어렵다. ‘본다’와 ‘봤다’처럼 ‘채우다’와 ‘비우다’를 반복한다. 

  노숙자의 죽음에 신문은 한 줄 기사도 아낀다. 비었다고 하여 그의 삶마저 가볍게 보는 것 같다.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의 자리는 아무런 표도 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단물에 젖은 사회는 사람을 도구화한다. 소모품처럼 마구 사용하고 쓰임이 없어지면 버린다. 버려진 물건에 미련을 갖거나 쳐다보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누구나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빈 것은 언제나 가볍고 그들이 사는 현실은 무겁다. 삶이 무거울수록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있다. 살아 내야만 하는 서민들의 삶이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가진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비우기와 채우기를 반복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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