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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Jun 28. 2022

영어의 괴로움 우리말의 즐거움

읽고 말하고 쓰면 즐겁다

시은: 이 책은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잘 모르겠어요. 뭔가 복잡해요.

나 : 어떤 점에서 그런 거 같아?

시은: 주인공의 친한 친구가 죽어서 슬픈데 뭔가 가슴 벅찬 느낌이 있어요.

나 : 보이는 현상은 슬프지만, 희망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지우 : 맞아요. 주인공은 무리에서 쫓겨난 어리고 약한 사자이지만 자신을 쫓아낸 무리의 왕에게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아서 강한 사자이기도 해요.

나 : 약함과 강함이 동시에 있다는 거지? 그런 걸 역설적이라고 해.

시은 지우 : 역설이 뭐에요?

나 : 뭔가 서로 반대되는 말이 동시에 있어서 논리적이지 않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를 말하는 거야. 주인공에게 강함과 약함이 동시에 있으니 역설이지!
시은 지우 : 아하!     


학생 중심 수업은 모국어일 때 더 쉽다

  초등학교 4학년 시은이와 5학년 지우와 함께 이 현 작가의 <푸른사자 와니니>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역설’에 대해 설명하게 되었다. 역설의 정의를 암기하고, 교과서에서 예시를 암기하고, 시험을 보는 식의 공부가 학교 공부다. 반면 좋아하는 동화책을 읽고 그 내용에 감동하고 독후 활동으로 친구와 선생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역설이라는 단어를 배우는 수업은 이상적인 수업이다. 이런 수업은 내가 꿈꾸는 학생 중심 수업이다. 학생이 수업을 주도해 나가고 선생님은 그 옆에서 코칭을 하는 수업을 이상적인 수업이라고 현대 교육학에서는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수업을 해본 본 경험이 없다. 입시 영어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으로서 학생 중심의 수업을 실현하는 방법은 학생들에게 교재 선택권을 주거나, 수업 진행 순서와 진도 나가는 속도를 정하게 해주는 정도다. 단어와 문법을 암기해야 하는 외국어 학습은 아무래도 학생 활동 위주의 수업을 해나가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를 잘 외우려면 배운 단어를 사용해서 일기를 쓰거나 문장을 만들어 보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작문은 단어와 문법 지식을 요구하니 걸림돌이 많다. 또 많은 맥락에서 암기하는 단어를 만나서 단어의 쓰임을 느껴보면 좋다. 단어의 어원을 알아서 같은 어원의 단어들을 살펴보거나 한 단어에서 나오는 파생어, 유의어, 반의어 등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이런 이상적 방법은 잘 쓰이지 못하고 단어장 암기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 물론 좋은 단어장에는 예문과 유의어, 반의어 설명과 단어의 뉘앙스 차이 설명이 잘 나와 있어서 어느 정도 도움은 된다. 그런데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영어 어휘의 수가 너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수능을 위한 단어 5~6천개 단어를 원서 읽기나 일기쓰기 등의 방법으로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단어 암기는 머리에 단어를 쏟아 넣고 반복하는 것이 시간 효율이 높다.    

  

  단어 암기를 원서 읽기와 쓰기로 완성하는 방법을 택하는 부모님들도 계시다. 그래서 한 학년 아래로 내려가서 학교를 다녀야 하는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때 영어권 나라에 어학 연수를 보내거나 고등학교 때 교환 학생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까지 해도 수능 1등급이 안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일상영어 casual English와 수능시험이나 전공서에 나오는 학문 영어 academic English를 동시에 잘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기와 쓰기가 찐공부

  학생 중심의 수업, 자기주도적인 수업은 아무래도 모국어로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모국어를  심장의 언어 heart language 라고 말하고 싶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마음의 평화를 외국어를 사용하는 괴로움과 비교하면 금방 느낄 수 있다. 배우자나 자녀와 같이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축복이다. 외국어로 산다는 것은 정말 불편하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이다. 싱가포르에 살 때 같은 아파트에 사는 미국인 부인들과 기도 모임을 한 적이 있는데, 나는 도저히 영어로 기도를 못하겠다고 했다. 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모국어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면서 문법 단어를 따지자니 기도가 막혔다. 심장의 언어는 감동적인 글을 읽었을 때 내 심장의 울림을 주고 이 울림을 마음껏 써 내려가게 해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 적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지우와 시은이가 <푸른 사자 와니니>를 영어가 아닌 모국어로 읽었다. 단어 문법에 막히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이 동화의 줄거리는 매우 드라마틱하다. 와니니가 독선적인 할머니 사자에 의해 쫓겨나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참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수사자 두 마리 잠보와 와산테라는 친구와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는다. 나아가 할머니가 왕으로 있는 동족을 해치려고 하는 나쁜 사자 무리와의 전쟁에 참여한다. 친구 와산테는 전쟁에서 죽게 되고, 어린 사자였던 와니니는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버린 할머니사자 마디바 앞에 선다. 다시 무리로 들어오라는 할머니 사자에게 이제는 당신의 사자가 아니라 와니니 무리의 사자라고 선언하다. 더 이상 누군가의 아이가 아니라 와니니는 와니니라고!    

  

  친구의 죽음을 통해 권력과 모순에 저항하는 어린 사자의 이야기에서 아이들은 크게 감동을 하였다. 200페이지가 넘는 동화책을 두 시간에 읽었다고 한다. (영어로 읽었다면 아마 한 달은 걸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책을 읽은 후의 벅찬 감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역설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대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용기와 용서와 같은 가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용감한 일은 와니니가 하이에나를 살려준 것처럼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것이라고 했다. 비록 할머니가 자신을 쫓 냈지만 자기 종족의 피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은 사명감과 명예를 위한 것이라고 하며 진지하게 말해 주었다. 이런 감격은 심장의 언어로 읽고 쓸 때 자연스럽게 말하기와 쓰기가 자연스러워진다. 나는 아이들이 충분히 정서적으로 고양되면서도 분석적으로 주인공의 행동을 이야기해줘서 많이 놀랐다. 늘 꿈꿔왔던 학생 중심의 수업을 해보면서 외국어를 가르치는 수업의 체증이 풀렸다. 그리고 가슴이 뛰었다.     


  한근태 작가의 말대로 지식을 한자로 풀면 공부는 말하기와 쓰기라는 결론이 나온다.

지知는 화살 矢와 입 口. 화살처럼 입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자신이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모르는 것이다. 식識은 말씀 言에 찰진 흙 戠 시로 구성되어 있다. 말을 흙에 새긴다는 뜻이고 쓰기를 뜻한다. 지우와 시은이는 동화를 읽고 말하기 쓰기의 작업을 잘 완수했고 진짜 지식을 얻었다. 이 두 꼬맹이 친구들은 이 동화책이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했다.
 

영어+독서 선생님
   영어나 국어나 다 언어다. 신기하게도 국어 등급이 낮은 학생은 영어 1등급을 맞기 어렵다. 수능 수준까지 오르면 언어유추 능력, 언어논리 능력까지 요구하니 단어 암기와 문법을 아무리 해도 고난도 문제에서 헤맨다. 천천히 읽으면 답이 나오지만 시험은 엄청난 시간 압박을 준다. 시간 안에 빨리 답을 찾는 것은 빠른 시간에 주제와 줄거리 파악을 하는 국어 독서 능력에서 나온다. 그걸 부모님들이 모르지 않기에 어려서부터 논술학원 독서 학원에 보내지만 정독을 가르치는 학원은 많지 않다. 역설적인 것은 빠른 독서를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 동안의 느린 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느린 독서는 같은 책을 여러 번 음미하면서 글을 쓰고 말하면서 천천히 읽는 데서 시작한다. 정독을 넘어서 숙독 熟讀을 해야 한다. 숙성시키듯 서서히 익히면서 읽는 독서는 정독보다 더 느리다. 숙독은 책이 없던 시절에 더 쉬웠다. 집안에 책이 없으니 있는 책을 수없이 반복해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책이 너무 많아서 책에 깔려 압사당할 것 같은 21세기의 독서환경은 속에서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고 스마트폰에 빠졌다. 이런 책의 홍수와 읽기의 가뭄 속에서 살아남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      


  수능 1등급은 지문의 속독 능력으로 만들어진다. 이 속독을 위해서는 ‘숙독’이 필요하다. 속독은 숙독에서 태어나는데 이 숙독을 도와주는 수업을 영어 선생님이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책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다면 영어만 가르치지 말고 동화책이나 성장 소설을 가지고 아이들과 독서 수업을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지우 시은이와 수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독서 및 글쓰기 수업은 늙어서도 계속하고 싶다. 독서 선생님은 할머니가 되어도 할 수 있다. 삶의 통찰과 경험은 나이가 들수록 깊어지니 책도 더 깊이 읽을 수 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어린 학생들과 읽고 느낌을 공유하고 글을 쓰는 것을 버킷리스트에 넣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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