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끈끈이 친구, 은주씨
자주 안 봐도 더욱 친해지는 역설적 친구
별이 아니라 친구를 헤아리며
4개의 동심원을 그렸다. 네 번째 원에는 아는 이 (그냥 아는 사람) 세 번째 원에는 공일이 (같이 일하는 사람), 두 번째 원에는 친한이 (친한 사람). 첫 번째 원에는 끈끈이 (내 마음을 다 말할 수 있는 친한 친구).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원에 누구를 적을 것인가였다. 나는 ‘다행히’ 첫 번째 원에 친구 이름을 적을 수 있었다. 동심원을 가지고 친밀도로 친구들을 범주화 해보는 활동은 요즘 내가 예산 상담복지 센터에서 하는 자원상담가 교육과정에서 한 것이다.
이 활동은 프랑스 파리가 생각하게 했다. 우리가 그린 동심원처럼 파리시도 5개의 동심원으로 구역을 나눈다. 1구역이 가장 중심지역이고 숫자가 커질수록 외곽이 된다. 나는 20대 때 파리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방세를 절약하기 위해 5구역에 살다가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2구역에 방을 얻었다. 2구역에 살면서 파리에 공원을 많이 산책했는데 뤽상부르그 공원에 유난히 의자가 많은 것을 보았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샹송 ‘고엽 Les Feuilles Mortes’의 가사를 쓴 시인 자끄 프레베르나, 그 노래를 불러서 나로 하여금 프랑스어를 배우게 한 이브 몽땅이 앉아서 책을 보았다고 하는 의자들이다. 나는 의자들이 우리 마음에 있고 관계가 악화되거나 멀어지면 공원의 저 빈 의자처럼 마음속의 빈 의자가 쌓여간다고 생각했다. 자원상담가 활동에서 한 것처럼, 파리가 도시를 5구역으로 나눈 것처럼 나도 친구들을 범주화하고 제1 범주에 있는 친구들이 떠나 버려서 내 맘속에 빈 의자가 생기지 않도록 우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았던 적이 있다. 친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게 10대 20대였다.
30대와 40대는 육아와 생업에 매달려 해외와 지방으로 자주 이사까지 다니는 바람에 학교 친구들과 인연이 거의 끊어졌다. 50대가 되면서 육아 가사노동에서 좀 자유로워 지면서 우정에 대해 갈망이 생겨났다. 젊은 시절에 헤아려 보았던 빈 의자가 마음에 정말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면서 서글퍼졌다. 마음에 남은 빈 의자가 많아도 중요한 것은 제1 동심원에 쓸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끈끈이는 누구인가? 나의 끈끈이 중 하나는 은주씨다.
마음 따뜻한 친구에게 항상 배운다
어제 은주씨를 인사동에서 만나서 대 여섯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인사동을 구경하면서 1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만나는 친구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사람을 첫 번째 동심원에 있는 끈끈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만남의 회수보다 만남이 얼마나 충만한가, 나의 삶에 빛이 되는가로 따지면 얼마든지 끈끈이다. 은주씨는 지난해 문학상을 수상한 동화작가다. 그녀는 50대에 들어서면서 등단해서 첫 작품으로 문학상을 탔다. 자녀가 초등학교일 때부터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웠던 엄마로서, 친구로서 나눴던 우정을 돌아보면서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무엇에 뛰어나지 않아도 존재 자체가 사랑받아야 한다는 마음을 담은 동화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두 딸을 초등학교 과정의 공교육 떠나 대안 교육으로 키웠고 작품에서 말한 대로 살았다.
그녀의 첫 작품을 읽고 나는 용감하게 나도 초등학생 두 명과 독서 수업을 시작했다. 남편이 영어 선생님 구인 광고를 아파트 게시판에서 보고 당장 전화해보라는 바람에 영어선생님이 된 것과 비슷하다. 은주씨 책으로 나는 ‘독서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첫 수업으로부터 시작해서 느낀 아이들의 반응과 활동을 생생하게 그녀에게 전하느라 무척 흥분했다. 은주씨는 어른들 평가는 의미 없고 아이들의 반응과 느낌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아이들이 은주씨가 쓴 책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고 인생책이 되었다는 말에 너무나 기뻐했다.
나: 옛날에 어느 인디언 추장님이 있었는데 내일 날씨를 너무 잘 맞히는 거야. 그 이유는 부족원들이 모르는 라디오가 추장님 방에 있었어. 나한테 은주씨는 추장님이 듣던 라디오야! 나에게 훌륭한 동화를 추천해주는 라디오!
은주 : 흐흐 . 그런데 언니 수업하는 아이들은 정말 정말 훌륭한 친구들이야. 독서 수업하면 아이들이 반은 책을 제대로 읽어오지 않아. 아예 안 읽어오기도 해.
나 : 어른들도 그렇지 아마...
은주 : 아이들이 책을 통해서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해 인식하고 세상을 보면 좋겠어. 언니 수업 이야기 들으니까 나도 이제 다시 독서 수업을 하고 싶어지는데!
그 동안 독서 수업을 하면서 힘든 일이 많아서 그만 두고 있었는데 나에게서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해 주니 나도 힘이 났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친구가 끈끈이 아니겠는가.
은주씨가 동화를 쓰고 또 독서 수업을 하면서 이 세상의 어린이들에게 양육강식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원리로 살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책임이나 사명감이 아닌 즐거운 일을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글쓰는 일이 행복하고 즐겁다고 했다. 나이 50이 되어 등단했지만, 평생 글을 쓸 수 있으니 작가라는 직업은 정말 자기 만족도가 높은 직업이구나 생각했다. 자기 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이 지휘자라고 들었는데 지휘자는 서 있을 수 없다면 할 수 없다. 독서와 글쓰기는 누워서도 할 수 있다. 더 이상 붓을 들 수 없게 된 앙리 마티스가 색종이를 잘라 작품을 만든 것처럼 병과 친구가 되어도 글을 쓸 수 있다. 누워 있다는 것을 의사들은 ‘사회적 죽음’이라고 하지만 누워서도 읽고 쓰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공부 못해도 괜찮아
과외 선생님으로서 나는 은주씨가 역설하는 ‘누구나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게 하고 싶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학생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는 몹시 긴장한다. 아이들 점수가 어찌 나올지 초조하다. 좋은 점수를 받는 아이들, 성실한 아이들만 사랑하고 성적이 저조한 아이들은 사랑하지 않고 버릴 것인가? 나의 금쪽이는 딸이고 학생들은 은쪽이라고 말하면서 은쪽이들을 불평등하게 대하면 안 되지 않는가? 성적을 올리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이긴 하지만 성적이 나쁜 학생도 다 똑같이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똑같이 사랑해야 나는 가르치는 일을 은주씨가 글을 쓰는 일처럼 즐겁게 할 수 있다. 성적 올리는 의무감만 있다면 내 일은 즐거울 수가 없다. 다행한 일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내 눈에 아이들의 모습은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도 못해도 푸릇푸릇해서 이쁘다. 10대 얼굴에 난 여드름까지 귀엽다.
나와 중학교 2학년부터 공부를 시작했으나 성적이 날 안 나왔고, 고등학교 올라와서 성적이 더 떨어져서 고민이 많은 한 학생이 나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학생: 선생님.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요. 노력하는데도 고등학생 되고 처음 받은 성적을 보고 너무 놀랐어요. 이런 성적으로는 대학도 못 갈 거 같은데 그냥 일찌감치 공부를 그만둘까 생각해 봤어요.
나 : 점수, 성적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그냥 공부해 봐. 학교는 너를 결과로 평가하지만 난 네가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성실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성적보다 더 중요해. 버티는 게 인생에서 제일 힘들어.
학생 : 엄마가 취업하려면 이과 가라고 하시는데 저는 어찌할지 모르겠어요. 수학 과학이 너무 싫어요.
나 : 네가 좋아하는 걸 해. 부모의 기대에 맞추어 살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좋아하는 걸 해야 잘 할 수 있어. 그래야 행복할 수 있고. 행복하지 않으면 공부도 안 돼. 악순환이야!!
자기계발서가 넘쳐 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거기에 나오는 것들을 실천하지 못한다. 아이들도 공부기술에 관한 책을 읽지만, 저자가 제시한 대로 실천하는 아이는 내 주변에 많지 않다. 아이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공감과 격려가 먼저이고 방법론은 그다음에 궁리해 봐야 한다. 아이들 성적을 올리는 사명에만 목숨 걸고 일하고 싶지는 않다. 성적이 떨어지면 학생은 나를 떠나고 내 수입은 줄어든다. 그러나 성적을 못 올리는 학생이라도 사랑해주면 나는 선생으로 오래 갈 것 같다. 성적이라는 실적이 아니어도, 선생님의 사랑에 공감하고 떠나지 않는 아이들은 있을 것이고 나는 과외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끈끈이 은주씨가 가르쳐준 한 수. 사명감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