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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do it 그냥 해봐

안하면 후회할거니까

by 민혜숙

청혼

나 : 일본에 출장을 3개월이나 가신다고요?

H : 네, 6월 말일에 떠나면 9월 말에 올 예정이에요.

나 : (심각하게) 그럼 저와 결혼 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헤어지자는 뜻인가요?

H : (당황하며) 아... 그게 결혼을 하겠다는 거죠!!!


스티브 잡스가 말했다.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일은 한국사회에서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나서 장녀라는 책임감을 늘 느끼는 나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할 때는 나는 너무 논리적으로 따지지 않고 마음을 따랐다. 윗글의 H는 결혼하기 전의 내 남편이다. 소개팅으로 만난 남편을 두 번째 만났을 때, 예의상 나를 만나 주는 거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직관적’으로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눈빛과 말씨로 알았고 연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만난 지 2개월 쯤 되었을 때 남편은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본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90년대 중반의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2개월 만난 사람이 3개월 동안 연락이 불편한 상태로 지내야 한다는 선언은 헤어지자는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호한 상태를 벗어나려면 직구를 날리는 수밖에 없다. 결혼일지 이별일지 양자택일하슈!


이 질문에서 남편이 좀 생각해 보자거나 지금은 대답하기가 힘들다고 했다면 나는 그만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것이다. 즉답을 원하는 나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예스라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직관적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스물 여덟 끝자락에 나는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급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의 마음을 따라 솔직하고 용감하게 행동했다.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것은 괜찮지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나로하여금 그렇게 용감하게 했냐 하면 그것은 그냥 콩깍지 쓰여서이다. 신이 인류가 번성하고 역사를 이어가도록 만든 신묘한 장치로서 콩깍지. 지금 20대 30대는 너무 이성적이어서 너무 미래를 생각해서 그런지, 연애는 낭만이고 현실은 괴롭기만 해서 그런지, 젊은이들에게서 콩깍지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다.

할머니표 영어

내 인생에 배우자 선택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선택은 충남 예산으로 이사 온 것이다. 서너 명의 엔지니어가 모여 벤처기업을 시작한 남편이 예산이라는 그곳에 가서 공장을 지어야 하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미 남편은 새로운 사업이라는 모험을 시작했고 나에게 같은 배를 탈 거냐고 물어보았다. 별 고민 없이 나는 ‘직관적’으로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예산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중학교 1학년 한창 사춘기였던 딸아이가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았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고 월셋집을 구했다. 딸아이 담임 선생님이 인천 송도 신도시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이 ‘교육’을 위해 목동으로 이사하느냐고 물었다. 목동이 아니고 예산이라고 하니 대한민국 어디에 있는 곳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혹시 내 남편이 법조인이나 군인이냐고 물었다. 딸아이는 당시 공부를 매우 잘해서 전교 1등도 한 직후였고, 아들 둘을 모두 민사고에 보낸 선생님은 시골행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셨다.

우리 가족이 예산에 온 지 10년이 조금 넘었다. 나는 제2의 인생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개척자 정신으로 영어 과외 수업을 시작했다. 아파트에 경비실에서 직인을 받아 아파트 게시판에 광고를 붙이고 한두 명씩 연락이 오는 학생들을 모아 수업을 시작했다. 내가 인천 송도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이 좀 특이했는지, 아니면 작은 지역사회라 형제 자매 사촌 친구까지 소개에 소개를 하며 선생님을 찾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 그런지 학생모집이 어렵지 않았다.

학생을 모집하고 수업한지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엄마표 영어’가 아니라 ‘할머니표 영어’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숙제를 못하면 성질부터 낸다. 그게 내가 내 딸에게 했던 방식이었다. 학생에게는 열 번도 더 설명해주면서 딸 아이에게는 세 번 정도 설명하면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엄마표 영어를 극복하기 위해 딸아이를 친구들과 묶어서 수업하면서, 되도록 할머니처럼 자상하고 화내지 않는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 때문인지 학생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이민 오듯 한번도 간 적 없고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에 온 내가 과외선생으로 살아남고 있다.

할머니표 영어는 내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딸아이가 핸드폰을 천안역 화장실에서 잃어버린 날이었다. 딸 아이가 천안역에서 예산역으로 와야 하는데, 모르는 전화번호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찾고 있다고. 그날따라 친정아버지가 손녀와 저녁식사를 같이 하려 서울에서 예산으로 내려와 계셨는데, 핸드폰을 결국 잃어버리고 약속시간보다 두세 시간이나 늦게 온 나의 딸에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핸드폰 잃어버리고 얼마나 마음조렸니? 일전에 나도 버스에 핸드폰 놓고 내렸을 때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몰라. 괜찮아.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셨다.

나는 “너 그렇게 물건 흘리고 다니는 거 정말 짜증 난다. 매번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언제 그 버릇을 고칠래? 핸드폰 너 돈으로 다시 사!”라고 말하려고 했다.

아버지가 핸드폰 분실 후 멘붕상태를 위로해 주시니 나는 아이를 혼낼 수 없었다. 나는 그 날 아버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공감이라는 삶의 지혜


송도신도시에서는 할머니표 영어를 발휘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들이 중간고사 기말고사 2번 정도 시험을 망치면 바로 과외를 끊었다. 스팩이 뛰어난 과외 선생님, 최고 브랜드의 학원이 많은 곳이라 선택의 폭이 넓어서였다. 나는 학생을 기다려주고 달래고 할 여유가 없었다. 반면 예산의 부모님들은 많이 기다려 주신다. 그래서 아이들과 더 상담을 많이 하고 학습 코칭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어서 그런지 어머님들은 내가 저녁을 급히 먹는 걸 아시고 김밥, 샐러드, 샌드위치를 보내주시고 김치나 과일도 늘 보내주신다. 손수 기른 옥수수, 사과, 상추등등 싸주신다.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다 안 계신 나에게는 먹거리를 누군가에게 받는다는 것은 항상 감동이다.


나는 할머니표 영어를 계속 할 예정이라 늙는 것이 별로 두렵지 않다. 서양의 할머니들처럼 예쁘게 화장하고 차려입고 식당에 모여 브런치를 먹고 차를 마시는 노인이 되고 싶다기보다 항상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는 노인이 되고 싶다. 노땅 꼰대로 늙어가지 않는다면 삶의 지혜로 아이들과 즐거운 수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점쳐본다. 김훈 작가는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면서 산골 마을에서 노인들을 만나고 이렇게 썼다.

한 생애에 걸친, 고되고 순결한 노동이 그들에게 배움의 은총을 베풀고 있었다. 그들은 배움을 터득했을 뿐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 노인들은 사람과 이웃과의 관계, 사람과 짐승과의 관계, 사람과 나라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야말로 저절로 알고 있었다.’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내 아버지가 심리학책을 읽지 않으셨어도 손녀의 마음을 공감해 주셨다. 이 십년쯤 과외 선생으로 산 것이 아이들 마음 읽는 법을 체득하게 해 주었다.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는 게 맞는다는 생각으로. 주저함이 없이 온 예산에서 할머니표 영어를 계속할 수 있으니 안 왔으면 크게 후회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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