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자녀 방어형 어머니와의 관계
선생을 떠나게 하는 엄마
어머니 : 왜 아이에게 ‘초등학생 같다’는 표현을 해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시나요?
나 : 그게 상처를 주려고 그런 게 아니고 숙제를 어려운 거 빼놓고 쉬운 것만 해서 초등학생 같다고 한건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됐나요?
어머니 : 우리 아이는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어요. 얼마나 열심히 하는 아이인데요. 고등학교 다니면서 하루도 편히 잠을 못 잤다고 해요. 내성적이어서 자기표현도 잘하지 못하는 아이예요.
나 : 내 뜻은 그런 게 아니었어요. 아이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어머니와 이렇게 통화를 하고 나는 몇 달 정도 수업을 더 진행했다. 나는 이 학생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말을 하면 어머니에게 그대로 옮길 것만 같아서 어떤 피드백도 주지 않고, 두 달 정도 더 수업하다가 핑계를 대고 수업을 중단했다. 보통 고등학생은 주 1회 수업을 하는데 이 학생은 3등급이 나온 상태여서 1~2등급 하려면 아무래도 수업을 주 2회로 늘려야 하고 나는 시간 여유가 없어서 더 수업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만둔 아이의 다음 선생님을 찾기 위해서 나는 어머니인 척하면서 여러 과외 선생님을 알아봐 주고, 아이가 새 선생님과 첫 수업을 한 것까지 확인하고 일을 마무리했다.
사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나의 가까운 지인이었다. 지인의 자녀를 가르치게 되면 이중관계가 된다. 나는 이 아이에게 그저 친절한 아주머니였다가 어느 날 선생님이 되었다. 항상 기분 좋은 말한 하던 아주머니가 자신의 영어실력과 성적까지 알아버렸으니 이 학생도 불편했을 것이다. 지인의 자녀를 가르치면 무조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와 내가 사이가 좋고 성적에 향상이 있으면 문제가 없지만, 뭔가 관계가 불편하면 수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생이 싫으니까 선생이 한 말을 엄마에게 일러바치는 일이 생기고 서로 감정이 상하기만 했다. 결국 나와 이 학생의 어머니와 사이마저 나빠졌다.
어머니 중에 아이를 지나치게 방어하는 경우가 있다. 아이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집착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선생의 의도를 왜곡하면서까지 자녀를 보호하려고 한다. 선생도 사람이라 부당하게 비난을 받으면 마음의 문이 닫힌다. 지나친 보호를 받은 아이들은 선생의 의도를 왜곡하고 자기가 유리하도록 어머니께 상황을 전달할 여지가 있다. 앞뒤 정황은 무시하고 초등학생 같다는 표현만 딱 떼어서 어머니께 전달하면서 상황을 많이 왜곡했을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지나치게 방어하면 선생은 자연스럽게 가해자가 된다. 나에게 상황을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무조건 선생이 ‘상처’를 주었다고 주장하면 선생인 나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서로 화를 내면 똑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 일단 참았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 분들을 감정 노동자라고 하는데 과외 선생에게도 감정노동이라는 면이 있다. 교육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으므로 학부모와는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다. 화를 내지 않으면서 지혜롭게 수업을 중단하기 위해 학생의 다음 선생님을 찾는 것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과외선생의 쓸모
공교육이나 대형학원과 달리 한 명 혹은 두세 명과 수업하는 과외 선생은 내 아이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학습 태도 및 잠재능력 예상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다. 과외 선생은 어쩌면 자녀의 학습 상태를 부모보다 더 정확하게 잘 아는 사람이다. 과외를 시작해서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까지 같이 생활하다 보면 매우 세부적인 사항까지 알게 된다. 수면패턴이 어떤지, 글씨를 어떻게 쓰는지, 숙제를 어떻게 해오는지, 어떤 과목을 잘하고 못하는지, 부모님과 사이는 어떤지 등등. 중3 때 1년 정도 고등 선행학습을 하다 보면 이 아이가 내신이 치열한 비평준화 고등학교나 자사고를 갈 수 있을지를 어느 정도 그림이 보인다. 그 과목에 대해서 학생이 드러내 보이지 않는 잠재력도 가늠할 수 있고, 고등학교 진로를 정할 때 결정적 조언을 할 수도 있다. 부모님들은 국어 수학 영어 등의 사교육 선생님의 의견을 종합해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중학 내신만으로는 얼마나 고입 준비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서양 속담이 있다. 티백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야 무슨 차인지 구별이 된다고. 고등 과정이라는 뜨거운 물을 부어 보는 사람은 과외 선생이다.
며칠 전 중1부터 고2까지 4년 반이나 수업한 고3 여학생이 너무 보고 싶어서 며칠 전 만나자고 했다. 평가원 6월 모의고사 분석을 잠시 해주고 상담을 했다. 정시를 준비하는 이 학생은 이과에 가는 게 취업에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이과에 갔지만, 아무래도 법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문과로 지원하게 될 거라고 했다. 이 학생은 중학교 때부터 헌법 민법 등 법전과 법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고 국어 모의고사는 1등급은 물론이고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다. 나는 이 학생이 이과로 결정하기 전까지 변호사나 변리사를 직업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었다. 대학 진로에도 과외 선생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나 같은 선생 놓치는 건 큰 손해입니다’라고 속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선생의 조언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경우, 어머니의 분노 뒤에 숨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화간 난다. 베토벤 월광 피아노 소나타 3악장 악보 위 왼쪽에 빠르기를 나타내는 표시가 있다. 프레스토 아지타토 presto agitato 매우 빠르고 격하게. agiter (뒤흔들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와 비슷한 agitato가 내 마음이다. 마음에 격동이 일면 피아노가 부서지도록 치는 연주를 들으면서 마음을 다스린다. 이열치열처럼 격노한 마음은 격정적 연주로.
나는 이중관계를 맺고 학생을 가르치다가 학생과 그 어머니 모두를 잃은 것이 마음이 아팠다. 나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몇 달 정도 지나고 나니 휘몰아치던 감정도 조용해지고 내 마음의 상처도 아물었다.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고, 나쁜 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다. 우리 인생사가 다 그런 것 같다. 좋은 일 나쁜 일이 교차로 일어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감사하고, 나쁜 일이 있을 때는 김사인 시인이 말한 대로 다 ‘공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 해집니다’
김사인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