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매는 없다구요
나: (선생님 앞에서 쇼팽의 그 유명한 녹턴 2번 E플랫 장조 첫 부분을 연주한다)
선생님: (큰 소리로) 야아아아! 너 또 연습 안 했지!
나: 아 요즘 시험기간이라서요...
선생님 : 손 바닥 대. 딱! 딱! 딱!
나 : (눈물이 그렁그렁)
선생님 : 너 치는 거 쇼팽이 들으면 관뚜껑 열고 나오겠다. 다음 시간에 또 연습 안 해 오면 다섯 대 맞는다!
나의 피아노 선생은 최악의 선생이었다. ‘님’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 나는 중2병을 앓고 있는 중2 학생이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악보 위에 선생님의 육필흔적이 있는데 세월이 흘러도 아직도 선명히 볼수 있다.‘또O 5대’ (또 연습 안하면 5대 맞는다).
무용을 전공하고 싶으셨으나 한국전쟁 이후 황폐한 환경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는 일찍이 내가 피아노를 배우게 하셨다. 초등학교 1학년때 오류동에서 당산동 시범아파트로 이사왔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 피아노레슨하는 선생님이 계서서 거길 다녔다. 중학생이 돼서부터는 전공을 시킬 마음이셨는지 비싼레슨비를 주고 개인 선생님을 붙여 주셨다. 집 안에 피아노가 있게 된 건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몇 십만원의 유산을 받게 되셨는데. 그 돈을 몽땅 딸을 위해 삼익 피아노를 구입하는데 쓰셨다.
나의 의지와 별 상관없이 부모님의 관심과 과도한 투자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성원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악의 학생이었다. 정말 연습하기가 싫었다. 피아노와 웬수인 학생이었다. 피아노 가방에는 4권 정도의 책이 있었다. 하논, 체르니, 바흐, 쇼팽 그리고 가곡집. 그나마 가곡집은 칠만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가곡 동심초. 아빠가 좋아하는 가곡 선구자 이런 곡을 치는 건 재미 있었는데, 하논 바흐는 재미없고 쇼팽은 어려워서 연습을 끝까지 끝까지 미루다가 선생님 오시기 전 한 두 시간 치고 레슨을 받았다.
안 되겠다 싶은 선생님이 ‘자극’을 받으라고 한국일보인지 동아일보인지 생각도 안나는 콩쿠르에 나가게 하셨다. 대회에 나가야 하니 더 연습을 많이 했다. 콩코르 예선을 하는 날 신문사 강당에 들어섰는데 나는 여기서 완전히 패닉상태가 되었다. 강당문을 열고 무대로 들어섰는데 넓은 강당에 개미 한 마리 없고 어디 숨었는지 모르겠는 심사위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르는 강당 위의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앞 참가자가 땀이라도 흘렸을가봐 손수건으로 건반을 쓰윽 닦은 후 벌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몹시 떨면서 연습한 곡을 다 치고 일어섰다. 연주가 끝나자 죽음같은 정적이 다시 흘렀고 나는 들어왔던 문을 향해 걸어가 문을 열고 강당을 나왔다. 결과는 예선 탈락.
선생님은 연습 안하면 그렇게 되는 거라고 하시면 두 번째 대회를 나가자고 했는데 나는 여기서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나는 도저히 전공을 할 인재가 못되니 피아노 그만 두겠다고. 어머니는 실망하셨지만 더는 강권하지 않으셨고, 나는 피아노를 절대 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다.
다시 피아노로
세월이 지나 우연히 다큐 방송을 통해 글렌 굴드라는 피아니스트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연습하기 싫었던 바흐 피아노 평균율을 들으면서 바흐의 피아노곡에 관심이 생겼다. 나의 선생님이 만약 이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 주셨다면 나는 피아노를 계속 쳤을 지도 모르겠다. 오디오도 없고 음반도 없던 시절 음악의 아름다움과 친해지도 전에, 연습 안하면 때리는 선생에게 나는 도저히 음악을 배울 수 없었다. 피아노를 때려치고 피아노는 쳐다도 안 보았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고 친한 친구들이 작곡과를 가면서 클래식 음악 음반을 많이 빌려주어서 듣게 되었다. 취직 하자마자 은행에서 대출 받아 글렌 굴드 전집을 산 친구가 바흐의 토카타와 인벤션이 있는 앨범을 빌려주며 들어보라고 했다.
잠이 오지 않는 야심한 밤. 어려운 성경 구절을 보면 잠이 오듯 어려운 클래식을 들으면 잠이 올 것 같아. 포터블 CD 플레이어에 음반을 넣고 해드폰을 쓰고 한곡씩 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근데 잠이 오기는커녕 정신이 더욱 맑아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불꺼진 아파트를 바라보면서 글렌 굴드의 터치에 빠져 들었고 급기야 각성의 레벨은 더욱 높아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를 춤추게 한 곡은 바흐의 토카타 G minor, BWV915였다. 나중에 친구에게 물어보니 클래식 음악하는 사람은 마약이 필요없다고 했다. 마약 없이도 삼매경에 빠지니까. 나는 그 때부터 ‘또O 5대’라고 써 있는 악보를 꺼내서 연습을 다시 했다. 그래서 지금도 피아노 쳐보라고 하면 야상곡이라 알려진 그 달콤한 곡을 칠 수 있다. 그리고 그 곡을 정말 사랑한다. 또 치고 또 쳐도 정말 좋다.
선생이 할일 학생이 할일
최악의 학생은 바로 나. 항상 연습 안하는 나. 음악을 안 좋아하는 나. 잘 배우고 있는 것처럼 부모 속이는 나. 그건 내가 과외 선생님으로 만나는 최악의 학생과 정말 같다. 항상 숙제 안하는 학생. 영어 안 좋아하는 학생. 부모에게 과외 잘 다니고 있다고 속이는 학생. 이 학생들은 숙제를 80%정도 해 온다. 하논 체르니 바흐 쇼팽 가곡집을 가지고 다닌 나처럼, 영어 단어, 듣기, 문법, 독해책을 들고 다닌다. 아마도 독해책이 그나마 이야기라 할만하고 나머지는 정말 싫을 것이다. 그래서 숙제를 안해오면 혼 날테니 한 80%만 해온다. 그런데 80% 완성도로 공부하면 80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50점이 나온다. 고등학교 내신 영어 평균은 50점 정도 된다. 그러니까 딱 5등급 나오는 점수다. 어려운 20%의 문제는 안풀고 쉬운80% 문제를 풀고, 어려운 단어 20%빼고 나머지 외워온다. 이 20%의 결손과 빵꾸가 중고등 6년이 쌓이면 5등급이 나온다. 그냥 공부 안하고 놀면서 6~7등급 받는게 낫다. 노력 하는 듯 보이면서 부모의 시간과 돈을 다 쓰면서 5등급 받는거 보다는.
나는 최악의 선생이 되지 않으려고, 아니 최선의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을 웃으면서 대하고 농담도 많이 하고 간식도 준비하고 시험을 망쳐도 절대 혼내지 않는다. 대신에 어떻게 더 잘할 것인지 학생과 함께 궁리한다. 이태석 신부님의 전기를 쓰신 구순환 피디님이 쓰신 <우리는 이태석입니다>에서 의사이셨던 이태석 신부님이 아니라 관악단을 지도하셨던 음악 선생님으로서 신부님을 상상했다. 항상 웃으시면서 친절하고 정성스럽게 환자를 대하셨듯 음악을 배우는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대하셨다고 한다. 학생이 공부를 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선생님과의 친밀감인데, 선생님의 웃음은 그 친밀감의 시작이다. 아이들은 선생님 앞에서 처음에는 다 조용하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웃어야 아이들이 따라 웃는다. 선생님과 마음의 벽이나 의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선생님의 책임이라면 학생의 책임도 있다.
학생의 책임은 숙제다. 숙제를 잘 하려면 자기가 공부하는 이유를 알고 있어야한다. 목적이 없으면 중2때 나처럼 된다. 내가 왜 피아노를 쳐야하는지도 모르고 피아노를 전공하면 어떤 삶을 사는지도 몰랐다. 그냥 부모님이 피아노를 사주신 것이 부담스러워 대충 하는 척만 했던 것이다. 학생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목표는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고, 문제를 다풀고 채점하고 왜 틀렸는지 생각해 보는 것까지 해야 숙제를 마치는 것이다. 학생 입장에서 대충 풀만한 문제 풀고 어려운 건 남겨 놓고 80%는 마쳤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숙제의 반에 반도 못했다고 판단한다. 그렇게 80%만 하는 학생이 최악인데 학생 본인이 자신이 최악의 학생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 나는 그 학생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다. 그것이 과외 선생의 비애다. 내가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어도 손을 잡지 않는다.
장기 목표는 미래에 원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고, 단기 목표는 숙제이다. 중1 중2 학생들이 너무 직업을 몰라서 나는 직업카드를 가지고 테스트를 한다. 오늘도 수업 어느 정도 마치고 아이들과 직업카드 검사를 했다. 3명의 아이들이 각각 컴퓨터공학자, 광고홍보전문가, 방송연출자 같은 직업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았다. 직업카드를 통해 컴퓨터 관련한 직업이 매우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멀티미디어디자이너, 웹개발자, 시스템운영관리자, 컴퓨터게임 개발자등등.
내가 피아노를 배울 때 내가 연주하는 곡의 작곡가에 대해 더 알았더라면, 그 곡을 좋은 오디오로 들어봤다면, 부모님과 음악회에 가 봤다면 피아노를 더 좋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어 외적인 것을 수업에 많이 버무려 넣는다. 영어 문법 단어가 너무 지겨워질 무렵, 나는 세상의 다양한 직업에 대해, 돈 많은 백수로 살면 안되는 이유에 대해, 이태석 신부님처럼 타인을 위해 자기 몸을 바치는 것에 대해, 공부를 하면 어떤 점이 좋은지에 대해, 석사 박사과정에 대해, 유학이나 교환학생가는 것에 대해, 이성친구를 사귀는 면 좋은점과 나쁜점에 대해 주제는 끝이 없다. 심지어 성교육도 한다. 아이들은 영어 외에 궁금해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영어 단어 설명에 졸음이 쏟아지는 아이들이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하게 하면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그럼 나는 다시 재미있기 몹시 힘든 문법 설명을 시작할수 있다. 나의 이야기에 신나하는 아이들은 숙제 완성도가 높아지고 성적도 오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늘 내 속을 썪인다. 제발 내 손을 잡고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