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고딩2학년
희망은 사라지고 공포는 다가온다
나 : 다음 주 수요일이 벌써 모의고사 보는 날이네.
유진 : 선생님 3교시 영어문제를 풀다 보면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나 싶어요.
나 : 2교시까지 수학 푸느라 100분 동안 진을 따 빼고 밥을 먹고 나서, 읽히지도 않는 영어문제를 읽다 보면 슬슬 잠이 오지 않냐?
유진 : 맞아요. 근데 등급은 오르지도 않고...
나 : (속으로) 아... 영어는 어렵다...
고민 많은 10대
평소에 너무나 배려심이 많고 차분한 유진이가 영어 선생님에게 영어문제 푸는 걸 ‘이 짓거리’라고 한 걸 보면 영어에 많이 화가 나 있는 것 같다. 영어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많이 든다. 고등학교 2학년은 위기의 학년이다. 1학년은 희망에 부풀어 있고 3학년은 수용하는 시기이다. 대부분 수시로 대학을 가는 이 지역 아이들은 3학년 1학기 시험까지의 내신 성적으로 대학을 가기 때문에, 실제로 3학년은 3월부터 6월까지 4달에 불과하다. 7월 첫째 주는 기말고사 기간이고 기말고사가 끝나면 사실 고강도 시험준비는 끝이다. 수능 최저등급을 맞추어야 해서 수능 공부도 해야 하는 아이들은 2등급대 정도의 학생들이고, 3등급대만 되어도 최저등급이 없거나 있어도 아주 느슨하기 때문에 정시준비하는 학생들처럼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3학년은 5월에 중간고사 보고 6월 평가원에서 출제하는 모의고사를 보면 대충 내가 어느 대학을 지원해야 할지 감이 잡힌다. 그래서 3학년은 오히려 뜻밖에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고2는 문제의 학년이다. 중3부터 열심히 고입 준비로 선행학습을 하면 적어도 고1 과정까지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전국 모의고사 3년 치 기출 문제집을 사다가 열심히 풀고 분석하고 입학하면 소위 ‘선행빨’로 1년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영어가 1등급은 안 나와도 2등급은 유지한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면 3등급으로 4등급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다. 2학년2학기가 되면 선배 3학년들이 수시 원서 쓴다고 하니, 이제 1년밖에 안 남았다는 불안감이 업습하고, 1학년에 비해 영어문제의 난도는 껑충 뛰어오른다. 선행빨은 이제 바닥이 나고 다시 3학년 수준으로 선행을 해야 하는데 2학년 수준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너무 중요하다. 선행빨이 끝나갈 무렵 2학년을 대비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유진이는 1학년 겨울방학 때 영어 공부를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2학년이 너무 힘겹게 느껴진다.
아이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공부해야 할 시간에 ‘다른 짓거리’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리적으로 ‘다른 짓거리’를 못하도록 장치를 마련할 수도 있지만, 스마트폰 이용장애는 대부분 학생들의 문젯거리다. 중독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공부는 스마트폰과의 전쟁이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이디엇폰 idiot phone이라 해야할까. 예전에 TV를 바보상자라고 idiot box라고 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잘못이 뭔지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 해결 방안을 알고 있지만 해결못하는 이상한 고민이다.
지금 40대 50대는 지금 10대에 비해 학창시절에 고생을 많이 했지 고민이 많지는 않았다. 에어콘이란 물건은 어느 부잣집 거실에나 있는 것이어서 학교는 덥고 추웠다. 겨울이면 발이 꽁꽁 얼고 볼펜이 잘 굴러가지 않았다. 화장실을 더러웠고 선생님들의 주무기가 몽둥이여서 침묵과 순종을 덕으로 배웠다. 교복은 너무 불편했고 가방은 도시락까지 들고 다니느라 너무 무거운데 학교는 멀어 걸어가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건만 너희들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는데 왜 공부를 안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라떼 꼰대가 되시는 길이다. 부모님 세대는 고생스러운 시절을 보냈지만, 내가 왜 이것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것을 이겨내면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대학 입학은 성공적인 삶을 보장해 주었기에, 짜장면 한 그릇의 외식에도 행복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고민이 많다. 물리적 안락함을 주었다고 공부가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고1팀 4명의 학생 중 3명이 나가는 바람에 한 명만 남았다. 이 아이들 모두 좋은 환경의 아이들이었다.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부모님과 냉난방이 잘 되는 안락한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고 1이라는 학습량 대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나와 공부를 그만두었고 한 학생은 학교를 자퇴하기도 했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 생각난다.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은 제 각각 나름으로 불행하다.’ 공부도 그런 것 같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이해해 주시는 부모님과 절제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의 경우 각자 그 나름의 이유가 다양하다.
이해와 절제
성공적인 학습의 두 가지 축은 이해받는 것과 절제하는 것이다. 이 고민 많은 영혼들에게는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서로 이야기하면서 함께 고민해 줄 어른이 필요하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를 쓴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는 책에서 교회의 역할을 정의했다. 교회는 심리 상담소도 아니고 법정도 아니다라고. 그녀는 교회는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고 잃은 꿈을 돌이키고 그래서 충만한 삶을 회복하는 곳이라고 했다. 심리 상담소는 내 마음에 대한 지지를 받는 곳이긴 하지만 상담가가 답을 제시하거나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반면 법정은 내가 잘못한 것을 낱낱이 드러내고 그에 합당한 벌을 정해주는 곳이다. 나는 학교가 법정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성적으로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워 발가벗겨지는 곳이고, 그 성적으로 인생이 모조리 결정된다는 위협적인 말을 듣는 곳이다. 고민이 깊은 아이들은 학교에서 받는 성적으로 더욱 초라해진다. 고2가 되면 공부를 못해서 벌어질 현실이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불안을 넘어 가히 그것은 공포에 해당한다. 나는 가정은 심리상담소도 아니고 법정도 아니고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가 정의한 교회 같은 곳이라 생각한다.
모의고사 치는 날 어디 멀리 도망가고 싶은 유진이 같은 학생에게 부모님은 하느님처럼 용서와 이해라는 은총을 베풀어야 한다. 성적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위로해야 한다. 한편 스마트폰을 포함한 모든 중독적인 것으로부터 절제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게임, 도박, 스마트폰, TV, SNS, 알콜, 음식 등에 중독된 부모는 부모가 아니다. 절제를 가르칠 뿐 아니라 부모로서 절제된 삶을 살아내야 한다. 유진이의 경우는 좋은 부모님이 계시지만 아직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절제를 못 해서 고2의 위기가 왔다. 성적이 개판이어도 용서하고, 절제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주고, 매일 해야 할 일을 해내는 작은 성취를 느끼도록 해주어야 한다. 조금씩 느껴지는 그 변화는 신비롭게도 아이에게 내적인 강한 동기를 만들어 준다. 공감해 주시는 부모님 밑에서 마음을 열고 소통하면서 해내야 하는 것을 기꺼이 하게 하는 일은 기적에 가깝다. 그래도 그런 학생을 만날 때면 나는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고1 팀 4명의 아이들 중 3명이 나가고 혼자 남은 민선이는 이제 나랑 일대일 수업을 하게 되면서 그런 변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요즘 공부하는 즐거움이 뭔지 조금 알겠다고 한다. 비록 지난번 시험은 4등급이었지만 이번 중간고사는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이 짓거리를 왜 하고 있나’라고 했던 유진이에게 나는 계속 절제에 대해 조언을 해줄 것이다. 분명히 변화할 것이라 믿는다. 아이들은 사랑과 이해를 먹고 자라고 변화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나는 반려동물도 반려식물도 필요하지 않다. 성장을 지켜보면서 마음을 나눌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과외 선생의 축복은 자식이 아니어도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장을 보는 것은 진실로 즐거운 일이다.
이제 추석이 다가온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밤 꽉 차오른 보름달이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매일 보면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조금씩 변해서 보름달이 되기도 하고 초승달이 되기도 하는 달을 보면서 아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고3까지 마지막 날까지 달려가 주길 달님에게 빌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