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장만 더 풀자
나 : (체육관 팔근련운동 기계에 앉아서) 쌤 15개 이상은 도저히 못하겠어요.
PT쌤 : 딱 한 개만 더 해요.
나 : (온 힘을 다해 운동 기구를 한번 더 잡아 당긴다)
PT쌤 : 한계는 한 개를 더하면 극복됩니다. 딱 한 개만 더하면요.
2년 전쯤에 친구의 권유로 개인 운동수업을 받게 되었다. PT라고 부르는 이 수업은 내 인생을 크게 바꿔놓았다. 체육관에 가면 근력 운동은 하나도 안 하고 러닝머신에서 뛰기만 했는데, 근육을 만든 것이 돈 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육관의 그 많은 운동 기구를 사용해 볼까 하여 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뭔가를 처음 시작할 때는 무조건 좋은 선생님과 함께한다. 공부는 좋은 인터넷 강의로도 가능하지만, 운동이나 악기는 몸으로 배워야 하므로 전문가의 지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한다. 10회 강의를 등록했다. 나의 PT 선생님은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힘이 나는 30대 남성이었고, 엄청나게 우렁찬 목소리의 소유자였고, 얼굴을 찡그리고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조금만 웃겨도 웃어주는 아기처럼 내가 조금만 엄살을 떨어도 큰 소리로 웃어주는 자상한 분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운동을 할 때 큰 소리로 ‘하나, 둘, 셋’ 이렇게 숫자를 셌다. 목표가 15번이면 15번 다하고 한 개만 더! 라고 외치셨다. 내가 못한다고 애원할 때, 한계를 극복하려면 딱 한 개만 더 하면 된다는 진리의 말씀을 해 주셨다. 첫 수업을 받고 집에 와서는 근육통으로 앉고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의 근육통은 기분이 좋았다. 통증마저도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증거라고나 할까. 통증이 없으면 오히려 내가 운동을 덜 했나 싶었다. 10회의 수업은 중간에 휴일과 코로나로 인해 2달 정도에 걸쳐 이루어졌고, 근력 운동 덕택에 나의 달리기 실력도 쑥 올라갔다. 5Km를 28분대에 뛰었는데 내 생애 최고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선생님은 딱 하나만 더 하자고 나를 지도했고 따라 하다 보니 몸이 더 튼튼해졌다. 운동할 때 통증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이 있다. 시험공부 열심히 해도 시험을 망치는 일이 다반사라서 운동이 주는 이렇게 정직한 결과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들에게 나는 나이 PT 선생님이 가르쳐준 ‘한번 만 더 작전’을 적용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 서가를 돌아보다가 제목이 눈에 띄어서 성열관 교수님이 쓴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이란 책을 읽었다. 2012년 OECD 국가를 대상으로 학생의 학교 수업 참여 2가지 지표를 소속감과 출석률로 나눠 조사한 결과가 나와 있었다. 우리나라의 특징은 ‘낮은 소속감과 높은 출석률’이었다. 높은 출석률이 좋은 의미는 아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나와서 잠을 잔다는 뜻이다. 저자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현상은 낙제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출석만으로도 졸업할 수 있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들이 소속감은 없으면서도 학교에 나오는 것은 거부감이 없다는 점이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도 깨우는 선생님이 없고, 급식도 맛있고, 학교 냉난방시설로 교실은 쾌적한 환경이고, 친구들과 놀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학교를 그만 둘 이유가 없어 보였다. 잠을 자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해가 안되고 재미가 없으니까.
저자는 잠자는 현상을 학생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에 반대했다. 학생이 자는 상황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학생이 학습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게임이나 SNS 과몰입으로 잠은 안자니까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것을 막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면 잠자는 아이를 깨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저자는 수업에 참여시키도록 교과과정을 만들고 교사는 적극적으로 학생 참여형 수업을 진행해야한다고 했다. 모둠으로 토론을 하거나 문제해결이나 작업을 같이 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나는 학생을 참여시키면서 잠을 깨우고, 그런 다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할 때, 포기하지 말고 한 문제만 더 풀자고 PT 선생님처럼 한계를 ‘한 개 더’로 돌파하는 교사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선생님의 일방적 강의와 주입식 수업은 졸릴 수 밖에 없다. 고등학생 수능 모의고사 수업을 하다 보면 조는 학생을 발견하곤 했다.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부분의 해설지를 나눠주고 마음이 급해서 프린트를 죽죽 읽으면서 해석을 하고 중요한 부분 줄치라고 하다 보면 졸음에 빠진 아이들이 생긴다. 90분 동안 떠든 내 목이 아픈 만큼 아이들의 눈꺼풀도 무거워진다. 요즘은 수업을 할 때는 해설지와 문제풀이를 동시에 하거나 질문을 하면서 학생 참여를 유도한다. 보통 해설지는 PDF파일로 보내면 아이들은 테블릿PC에 저장하고 미리 예습을 한다. 예습 후에 내 설명을 들으면서 내 질문에 대답하니 훨씬 좋아졌다. 질문은 주로 문장의 문법적 요소를 물어본다. 왜 이 문장이 서술형 대비로 나와야 하는지 이유도 물어본다. 문장을 이해하기 보다는 문장을 분석해서 스스로 설명해야 하는 방식이 훨씬 좋다. 일방적인 온라인 강의보다 쌍방적인 오프라인 강의의 장점을 잘 살리는 것이 과외수업 성패의 관건이다.
수업시간에 자주 머리가 책상으로 떨어지며 누워버리는 중학생을 위해서는 게임처럼 문제를 푼다. 두 학생에게 누가 먼저 푸는지, 누가 오답이 적은지를 놓고 그 자리에서 경쟁을 부추기면 아이들은 서로 이겨보겠다고 열심히 한다. 이렇게 상승된 분위기에서 숙제를 낼 때는 아이들이 제안하는 것보다 문법책은 한 두페이지 더, 단어책은 한 단원 더 슬쩍 더 하자고 한다. 그럼 아이들은 그렇게 더 하겠다고 말해준다. 이런 수법이 통할 때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중학교 1학년 2학년 남학생들은 도대체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내 수업에서는 의자 위에 올라 무릎을 꿇고 앉거나, 아예 일어서도 괜찮다. 졸릴 때 과자를 먹어도 괜찮다. 과자를 먹다가 물을 달라하면 나는 꼭 얼음을 넣어 준다. 아이들은 얼음을 깨물어 먹으면서 잠을 깬다. 얼음을 그렇게 먹으면 치아에 안 좋은 건 알지만 수업 참여를 위해서라면 이빨이 잠시 희생당해도 어쩔 수 없다.
나의 이런 노력에 열매가 맺혔는지 자주 졸던 학생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숙제를 미루다가 수업 오기 직전에 하면 안된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문법 문제를 나랑 풀 때는 술술 풀리는데 며칠 지나서 풀려고 하면 전혀 기억이 안나서 숙제가 하기 싫어지니 수업 하고 바로 당일에 문법 숙제를 해야겠다고 한다. 이렇게 기특한 깨달음이 또 있을까? 엊그제는 수업을 마치고 단어 복습 숙제를 내주려하니 ‘선생님, 우리를 뭘로 보시는거에요? 40과 41과 새 단원으로 외워 올게요.’라고 했다. 이런 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에게는 큰 보상이다.
요즘 첼로를 배우면서 느끼는 것은 어려운데 재미있다는 것이다. 운동 후 생기는 근육통처럼 레슨을 마치고 오면 현을 누르고 있던 왼손 끝이 얼얼하다. 이 얼얼한 느낌이 기분을 좋게 한다. 얼얼한 손가락으로 다시 연습하고 싶어지고 연습하면 더욱 얼얼하다. 이 얼얼함이 실력이 된다는 것을 아니까 계속하게 된다. 너무 쉬우면 시시하고 너무 어려우면 포기하게 되는데, 이렇게 적당히 어려우면 더욱 하고 싶어진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이 약간은 얼얼한, 약간은 뻐근한 근육통처럼,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조금 더 하고 싶은 마음을 주는 그 미묘하고 섬세한 지점을 꼭 집어내어 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첼로 소리를 아름답게 내려면 가장 정확한 지점을 왼손으로 누르고 부드럽게 활을 현 위로 그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소리가 고통을 참게 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공부하는 고통을 매일매일의 작은 성취감으로 참는 것이 입시 공부이 원칙이 아닌가 싶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에게 권해야 한다. 얘들아 한 장만 더 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