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이는 중3 여학생다. 보통 중3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아이들은 고1 수능모의고사 3월 기출문제를 푼다. <빠른독해 바른독해>라는 고입대비 독해와 문법이 함께 나오는 고입준비 교재를 끝내면 기출문제를 풀어서 실력이 쌓였는지 확인한다. 하은이는 성실하게 중1부터 열심히 공부한 학생인데 생각보다 너무 문제 푸는 속도가 느리고 정확도도 떨어졌다. 나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가 되었다. 의대에 가서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차분하게 공부할 줄 알고 숙제도 잘해온 학생인데 이게 웬일인가. 영어 수능기출문제는 70분 안에 풀어야 한다. 하은이는 30분이나 더 시간을 들여 100분 시간을 썼는데도 문제를 다 풀지도 못하고 푼 문제도 많이 틀렸다. 실제로 70분에 맞춰서 시험을 봤다면 점수가 더욱 낮았을 것이다. 나는 80점대는 나올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고등학교에서 영어 점수를 잘 받으려면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한다. 빠르고도 바른 독해. 우선 빠르기는 언어의 유창성 fluency 에 해당한다. 유창성을 강조하는 공부가 영어회화다. 어법에 약간 틀리게 말해도 원어민에 가까운 억양과 발음을 구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 완전한 이해를 하지 못했어도 영어원서를 사전을 찾지 않고 직독직해를 하면서 쭉쭉 읽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반대로 바르다는 것은 언어의 정확성 accuracy를 말한다. 정확성은 어법의 완성을 의미한다. 좀 느리게 읽거나 말하더라도 틀리지 않게 바르게 읽거나 말하는 능력이다. 정확성은 이메일이나 에세이등 쓰기를 할 때 그 진가가 나타난다. 어법이 틀린 글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읽고 싶지 않다. 정확성은 글쓴이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두 능력은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요구한다. 하은이 같은 경우는 정확성이 뛰어난 학생이다. 단어시험을 보거나 주어진 범위의 어법시험을 보면 좋은 시험점수를 받는다. 그래서 중학교 때 내신성적도 좋았고 영어시험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유창성의 결핍으로 고입에 앞서 큰 벽에 부딪혔다. 영어의 경우 중학교 때까지의 성적으로 고입 이후의 성적을 가늠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서로 대항작용을 하는 정확성과 유창성을 동시에 확보한 학생만이 살아남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은이 같은 학생이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가끔 있다. 글을 이해하는 문해력은 있지만 읽는 속도 자체가 느려서 영어뿐 아니라 우리말로 된 책을 읽을 때도 느리다. 느린 것이 중학교 내신성적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그 습관을 버리지 않게 된다. 더 나쁜 것은 느리게 읽고 느리게 문제를 푸니까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그것을 부모는 아이가 매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아이는 쉴 시간, 놀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니까 공부가 지겨워지고 성취감도 느끼기 힘들다. 차근차근 공부하고 가르쳤다고 생각했는데 하은이 시험결과는 좋지 않았다.
바른독해가 먼저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문제집을 덮고 나중에 풀자고 했다. 그리고 <빠른독해 바른독해> 복습에 들어갔다. 다시 한번 바른 독해를 위해 노력하되 시간의 압박을 온전히 느끼면서 공부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은이에게 구글타이머라 새로운 타이머로 공부하라고 했다. 1분부터 60분까지 타이머로 맞출 수 있다. 설정한 분대로 나타나는 빨간색 면적이 줄어들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이는 시계인데, 이 시계를 1시간에 맞춰놓고 되도록 빨리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공부하되, 다시 기초를 잡는 노력하기 시작했다.
영어의 모든 길은 문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단어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통한다. 영어 교육에 대한 목표가 높으신 부모님들은 자녀가 영어원서를 읽기 바라신다. 아직 기초도 없는 아이에게 유명작가나 유명 시리즈의 영어원서를 사주고 읽으라고 하시지만, 원서 읽기는 마치 모의고사 기출문제를 푸는 것처럼 많은 기초작업을 하고 난 후에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원서에 나오는 단어를 거의 모르는데 그 많은 단어를 단어장에 정리해서 외우고 문법 설명을 들어가면서 책을 읽을 순 없다. 책에 나오는 단어를 대부분 알고 있고 기본 문법이 끝나야 즐거운 마음으로 맥락으로 모르는 단어를 유추하면서 읽을 수 있다. 원서 읽기는 목표가 아니라 결과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능 모의고사 기출문제집으로 공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80점 이하의 점수가 나올 때는 풀 이유가 없다. 50% 정도의 지문 이해력을 가지고 근거도 없이 감으로 문제 답만 찾으려 하는 공부는 아무 소용이 없다. 하은이는 실망했겠지만, 모의고사는 내년 겨울방학에나 다시 풀 수 있을 것이다. 모의고사 문제집은 영어원서처럼 여태까지 공부한 것에 관한 결과로서 풀어야지 모의고사 풀이가 공부의 목표는 될 수 없다. 80점 언저리 점수를 받는 2등급 학생들이 기출문제만 풀고 있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 지문을 완전하게 분석하지 않고는 1등급으로 갈 수 없다. 답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답이 나오게 된 이유를 정확히 아는 정확성을 확보해야 그다음에 유창성, 즉 속도가 나온다.
공책정리는 ‘재정의’ 과정
흔히 학생들은 수학 문제를 풀고 오답노트를 만든다. 나는 영어도 오답노트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오답노트 만들라고 말해도 하도 아이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서, 최근 나는 40장 정도가 스프링에 묶여 있는 공책을 사놓고 아이들에게 필요할 때마다 나눠준다. 그리고 어법 문제에서 틀린 문장을 적고 맞게 고치고 왜 틀렸는지 어법 사항을 적어 놓으라고 한다. 그런데 왜 틀렸는지를 적는 것을 대단히 어려워한다. 어법 설명을 들으면 이해하지만 이해한 바를 쓰려면, 그 개념을 자기 말로 다시 써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일이다. 조금씩 도와주기는 하지만 되도록 자기 말로 하는 능력, 즉 개념을 재정의하도록 한다. 공부란 결국 재정의 redefinition의 과정을 통해 지식을 내면화 작업이다. 그 과정을 계속하면 하나의 개념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 되고 유추하지 않고 그냥 아는 것이 된다. 그냥 아는 것은 내공이다. 내공이나 직관은 수십 번의 재정의 하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 너무 아깝다’라고 버나드 쇼의 말을 김종원 작가가 <인문학적 성장을 위한 8가지 질문>이라는 책에서 인용했다. 나는 이 말을 중3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중3 아이들은 고등학생이 되면 지금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젊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여러 과외에 다니며 선행학습을 하며 고입을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고등학생 되기 전에 좀 놀아두어야 한다는 생각인지 허다한 시간을 낭비한다. 정확성과 유창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책에 자기가 배운 것을 재정의하면서 써나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드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빠른 독해 바른 독해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일은 숙제만 하고 땡이 아니라 자기 공부 시간을 갖고 공책에 고민의 흔적을 남겨야 가능하다. 얘들아! 내가 준 공책에 배운 거, 틀린 거 정리 좀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