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보다 백 배 더 중요한 것
다섯 글자 이상으로 말할 줄 아는 능력
나 : 선생님이 코로나에 걸렸어. 그래서 수업을 1주일 동안 못하게 되었어.
학생 A : 네
학생 B : 넵
나 : 얘들아, 빨리 나으시라 말해 줘야지!
학생 A : 선생님 빨리 나으세요.
학생 B : 선생님 빨리 나으세요. 표현이 서툴러 죄송합니다.
다정함은 생존력
올 것이 왔다. 코로나에 걸렸다. 주말에 몸에 오한이 나더니 월요일 아침에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코로나였다. 집에 돌아와 나의 모든 학생과 어머님께 한 주 수업을 쉬게 되었다고 카톡으로 연락을 하고 수업 일지를 살펴보고 1주일 동안의 숙제를 내주다 하루가 다 갔다. 아이마다 어머님마다 그 반응이 아주 다양하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중3 학생 두 명은 그저 ‘네’라고 대답을 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가 아프다고 하면 어서 회복하시길 바란다고 말하는 게 예의 정도가 아니라 정상적 인간의 반응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잔소리를 했다. 빨리 나으시라고 말하라고!
어머니들은 대부분 몸은 괜찮으시냐, 약 잘 챙겨 드시고, 물 많이 마시고, 푹 쉬시고 어서 나으시라고 많이 응원해 주셨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들 생각은 마시고 무조건 선생님 건강부터 챙기라고 하셔서 나는 잠깐 울컥했다.
반면 아주 짧게 ‘알겠습니다’라는 다섯 글자만 보낸 어머니가 한 분 있었다. 평소에도 말이 짧은 분이라 이해는 하지만 자식을 나에게 맡긴 지가 만 3년이나 되었는데, 그렇게밖에 반응을 못 하시는지 답답했다. 지난 학기 따님이 핸드폰에 빠져서 마냥 놀다가 중간고사를 50점 맞고, 정신 차려 기말고사 90점을 맞았을 때, 뜬금없이 ‘고맙습니다’라는 다섯 글자를 보내셔서 나를 당황하게 했다. 이 어머니의 아이는 현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있다. ‘애라 나도 모르겠다. 니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목표도 없고 노력도 안 하는 너를 내가 어찌 하겄냐’라고 나도 나자빠져 있는 상태이긴 하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없듯,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수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학생들도 있다. 나는 이 학생이 나와의 수업을 종료하겠다는 자발적인 선택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무튼, 이 어머니의 말하기 방식과 학생의 학업태도가 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감사나 위로의 표현을 ‘다섯 글자’로 할 수는 없다. 내가 사랑하는 학생들은 다섯 글자 이상을 사용하여 말할 줄 아는 다정한 학생들이다. 수업하러 공부방에 들어 올 때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하는 아이. 숙제가 많으면 선생님~하고 엄살을 떠는 학생. 선생님 드시라고 초콜릿이나 사탕을 건네는 학생. 카톡으로 질문 많이 하는 학생. 시험 못 보면 죄송하다고 하는 학생. 내가 주는 간식을 반가워하며 맛나게 먹는 학생이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전교 1등이고 내신 등급이 1.00이 나오는 귀신 같은 아이라도 수업시간에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자신의 사적인 얘기는 절대 안 하고, 내가 학습 조언을 하면 왜 진도 안 나가냐는 표정의 아이들은 나는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고객으로 본다. 학교에서 ‘성적으로’ 살아남는 아이들은 상위 20% 정도 아이들이다. 80% 정도의 아이들은 공부가 아니라 ‘친화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 조직에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거나 리더의 마음을 잘 읽어서 탁월한 팔로워나 조력자가 돼서 자신의 인생의 실력을 키워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못하고 친화력도 없다면 우선 친화력을 키워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정한 학생이 결국 공부에서도 인생에도 성공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다정함은 신뢰와 실천력을 만든다
어제는 내가 중학교 1학년부터 고2까지 가르쳤던 학생이 재수를 거쳐 의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생애 첫 의대 합격생이다. 벌써 2개의 의대에 합격했는데 아마도 지원한 5개 대학에 모든 대학에 합격할 것 같다. 2023년 학년도 수능 만점자는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신문사와 인터뷰했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모든 수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부분이 귀에 들어왔다. 의대에 합격한 이 학생 역시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가져가고 싶다고 했고, 고등학교 입학 직전에는 나와 공부한 문법을 자신만의 언어로 공책에 정리해보라고 하는 나의 충고를 받아들인 몇 안 되는 학생이었다.
내가 하는 학습과 생활적 조언을 잘 귀담아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학생이었다. 결국 성공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의 차이는 조언을 듣고 실천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부모님들은 많은 부모 교육서를 보고 정보를 접한다. 내용은 늘 비슷하고 듣던 이야기다. 자녀와 긍정적 대화를 하고 자녀를 믿어주라는 말. 귀가 따갑게 듣는다. 그걸 잘 알지만 실천하지 못해서 변화는 생기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공책에 배운 지식을 자기 말로 정리해야 진정한 나의 지식이 된다는 만고의 진리는 다 알지만 실천하지 못한다. 수능 만점자 뿐 아니라 1~2등급 하는 학생들은 자신만의 지식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몸소 실천한다. 숙제만 잘해도 90점 이지만 자신만의 노트정리까지 하면 100점이다. 그런데 이 노트 정리는 나에게 다정함을 준 학생들 그래서 나도 한없이 다정함을 내어주는 학생들에게서 가능하다는 걸 발견한다. 노트 정리하라고 내가 선물한 공책을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바른 글씨로 거의 종교적인 헌신의 마음으로 공부에 시간을 더 바치며 꾹꾹 눌러 글씨를 써가는 아이들을 보면 신뢰가 저절로 생긴다. 나의 조언을 믿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갈아 공책에 담아 주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위해 나의 열정을 바친다.
표현하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메시지에 답한 아이들을 보면서 교육의 본질을 생각해 보게 된다. 영어로 표현적 expressive라는 말이 있다. 개인의 자유와 표현이 중시되는 21세기에 표현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엄청난 단점이다. 가히 치명적이다. 서양사람들은 말을 할 때 눈썹 부분의 근육을 쓴다. 손도 많이 움직인다. 말할 때 눈썹이 위로 아래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다. 아마 손을 묶어 놓으면 그들은 말을 못할 것 같다. 서양 사람들의 좀 과장된 칭찬이나 반응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말로 표현할 줄 알고 상대의 감정과 의견을 경청할 줄 아는 것이 교육의 기본 목표다. 내성적이거나 외향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지식만 머리에 욱여넣는 것이 교육이 아니다. 표현할 줄 알아야 타인과 소통하게 되고 다정함을 발현할 수 있다. 선생님과 다정함을 나눠야 진정한 배움이 이루어지고 자신의 자원을 다 동원해 노력할 수 있는 동기가 된다. 선생님과 제자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자가 되지 않고는학습동기가 생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배움만이 아니라 인생을 외롭지 않게 살고자 해도 표현력은 필요하다. 현대인의 40%는 외롭다고 한다. <목회데이터 연구소> 지용근 소장님 말씀에 의하면 21세기는 개인의 시대이고 개인특성과 취향을 고려한 작은 모임을 사람들이 지향할 것이라고 한다. 동창회처럼 지연 학연으로 생성되는 그룹이 아니라 개인의 지향점과 취미에 의해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 모임을 만들거나 구성원이 되려면 개인의 의견과 감정을 표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냥 동창이라는 이름으로 나가서 술이나 마시고, 동창회에 나오지 못한 다른 동창들 뭐 하고 지내는지 인구조사나 하는 모임은 이제 더는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표현적으로 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다섯 글자로는 도저히 다정함을 나타낼 수 없다. ‘선생님, 빨리 나으세요’만 해도 여덟 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