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혼 당하지 않으려면...
‘삼식이’는 은퇴 후 집에서 삼시 세끼를 해결하려는 남편을 희화화하는 말이다. 또한 하루 종일 와이프 곁에 붙어있는 남편이라는 ‘하와이’라는 말도 있다 한다. 둘 다 은퇴 후 이래저래 몸과 마음 둘 곳이 없는 딱한 남편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거나 풍자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굳이 이런 비속어들로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실제 주변에 남성호르몬으로 무장을 시작한 힘세진 아내들이 갱년기 고지를 넘고 그 여세를 몰아 저항하는 남편들을 포위하여 결국 백기를 들고 투항케 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래전 들은 이야기로 일본에서는 은퇴가 가까워 오면 남자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요리학원에 등록하는 일이라고 한다.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은퇴 후 황혼이혼을 당하지 않기 위한 남편들의 여러 가지 자구책 중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2021년 기준 혼인 지속기간이 30년 이상 황혼이혼이 차지한 비중은 17.6%로, 10년 전인 '2011년 7.0%에 비해 10% p 이상 대폭 늘어났다 하니 이제 그저 남의 나라 일이라 웃어넘길 수는 없을 것 같다.
황혼이혼이 증가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은퇴 후 남편들이 집에 머물면서 그동안 잠재 되어 있던 부부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생기는 아내들의 각종 스트레스와 질환이 이혼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은퇴 후 집에만 있는 남편을 ‘코로나 보다 무서운 삼식이’라고까지 한단다. 이쯤 되면 은퇴 후 황혼이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삼식이가 되지 않거나 삼식이가 되어도 살아남을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경우는 여행, 모임 등 바깥활동 외에 집 가까이에 있는 헬스장, 테니스장 등에서 운동을 하거나 가까운 공원 등에서 산책을 하고 내 취향에 맞게 꾸민 나만의 공간에서 독서, 글쓰기 등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소위 말하는 ‘집돌이(Homebody)’로서 집은 내가 가장 선호하는 공간이고 경제활동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일정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삼식이로 지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처음 은퇴 계획을 세울 때는 삼식이가 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의 방법을 모색했었다. 일단 집 밖으로 나서기 위해 근교에 세컨드하우스를 마련하거나 가까운 곳에 공유 오피스 등을 임차하려 했었다. 그러나 세컨드하우스는 여러 이유로 내 버킷리스트의 우선순위에서 미루어 놓았고, 공유 오피스 등은 일부러 집을 나와 경제적 부담과 불편을 감수하는 게 내키지 않아 포기했다.
결국 외형적으로 삼식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장고 끝에 피할 수 없다면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여 그 안에서 작은 즐거움이라도 찾으며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시대에 맞지 않는 사고를 과감하게 전환하고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 동화되기로 하였다.
동물들이 변화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를 하듯 내가 와이프와 공생하기 위해 실행 중인 이런저런 삼식이의 진화 이야기가 현재 또는 예비 삼식이분들의 슬기로운 은퇴생활에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란다.
#1 1년의 퇴직 준비 기간이 주어졌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요리학원 등록이었다. 호기롭게 와이프가 30년 넘게 밥상을 차려 주었으니 나도 앞으로 30년을 그렇게 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지고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4달 정도 수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생활요리 과정이었는데 순두부찌개, 백김치, 떡갈비 등 여러 가지 요리를 하는 법을 배웠다. 수강생이 6명 있었는데 여성은 1명이고 모두 60세 전후 남성이었다. 아마 대부분 나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아닌가 싶었다.
남성 수강생 모두의 공통점은 수업에서 만든 요리를 가지고 집에 가면 와이프들이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두 열심히 배우고 어렵게 만든 수업의 결과물을 정성스럽게 싸가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곤 했다.
사실 내가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한 건 어쩔 수 없이 삼식이가 되더라도 직접 만들어서 먹는다면 적어도 와이프 눈치를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 삼식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3끼 먹기만 하는 삼식이에서 3끼 중 1~2끼 정도를 직접 준비하는 삼식이를 목표로 요리를 배운 것이다.
그리고 은퇴 후 드디어 실행에 옮겨 보았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지 않아 와이프가 어설픈 내 요리를 탐탁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아쉽지만 요리학원 심화학습반 수강 후 재도전하리라 후일을 기약하고 다시 하던 데로 간단히 차리는 아침 이외에는 와이프가 끼니를 준비하고 나는 식사 후 뒷정리를 위해 조용히 싱크대 앞에서 빨간 고무장갑을 낀다.
#2 돌아보면 은퇴 전 오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외벌이라는, 직장 일에 전념해 바쁘다는 이유 등으로 집안일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은퇴 후에는 상황이 바뀌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내 역할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청소, 세탁, 쓰레기 분리배출 및 반려견 목욕 등 여러 가지 집안일을 구분해 와이프와 분담을 할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와이프가 건강이 안 좋아 병원에 있는 동안 모든 집안일을 혼자 해보니 굳이 구분할 필요 없이 그냥 나 혼자 다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하고 심지어 요즘에는 와이프가 해 주는 밥과 집안일들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어 고맙게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도 청소하고, 쓰레기 버리고 AI처럼 알아서 집안일을 하는 삼식이 로봇을 와이프가 폐기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저녁에 해야 할 집안일들이 무엇인지 머릿속 프로그램을 점검해 본다.
#3 삼식이의 특징 중 하나가 집에 붙어 있으면서 와이프를 귀찮게 한다는 것 아닌가 싶다. 나도 은퇴 후 혹시라도 와이프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지나 않을까 하여 노심초사하며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려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 테니스, 해외여행, 그림 그리기 등 와이프와 내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취미가 여러 가지 있다. 그래서 은퇴 후 나 혼자 하고 싶은 것들에 앞서 가능하면 와이프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우선해서 실행하고 있다.
테니스는 오래전 외국 유학 기간 동안 운동을 싫어하던 와이프에게 가족 테니스가 로망이라며 설득해 열심히 가르친 덕에 함께 하는 취미가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나보다 와이프가 훨씬 더 테니스를 즐기며 살고 있다.
평소에 각각 소속된 다른 모임에서 운동을 하지만 가끔 와이프가 활동 중인 테니스 클럽 멤버와 부부모임도 하고, 내가 틈틈이 와이프가 요청하는 레슨도 해 주는 등 함께하는 테니스 스케줄을 우선으로 하는데 그렇게 밖에서 와이프의 넘치는 에너지를 소진시키면 집안이 평화롭다.
해외여행의 경우, 와이프가 가장 좋아해 은퇴 전후 제일 먼저 실행했던 것으로 여러 차례 계획했던 여행을 함께 다녀왔고 앞으로도 여건을 보아가며 와이프가 가고 싶다는 곳을 여행할 계획이다.
신기하게도 평소 조용한 성격의 와이프는 해외여행을 가면 텐션이 올라가고 생기가 넘친다. 결혼식 때 말고는 내 팔짱을 낀 기억이 별로 없는데 해외에 나가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다니며, 평소 자주 하지 않던 화장도 곱게 하고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립스틱도 바르는 등 다른 여자로 변신을 한다.
이 밖에도 삼식이로서 생존을 위한 나의 이런저런 변신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집안일 등이 이제 익숙한 나의 일상이 되어가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진화가 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와이프의 표정이 은퇴 전보다 해맑아진 것 같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