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알함브라 낙조
지난 봄 스페인을 여행하기 전에 집시와 플라멩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저의 단순한 생각은 집시는 예술을 사랑하며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공연 등을 하는 유랑극단 같은 사람들로, 플라멩고는 투우를 사랑하는 정열적인 스페인 사람들의 전통적인 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알게 된 집시와 플라멩고는 저의 생각과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집시의 사전적 의미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그 기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인도에서 발상하여 헝가리를 중심으로, 주로 유럽 지역 및 세계 여러 나라에 분포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이동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합니다.
플라멩고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예술로 정열적이고 화려한 무대 이면에는 집시들의 슬픔의 정서가 숨겨져 있다 합니다. 그라나다와 세비아의 플라멩고가 유명한데 그 차이점은 그라나다의 플라멩고는 표정과 몸짓에서 원초적이고 한이 느껴지는 반면 세비아는 잘 다듬어진 세련된 스타일이라 합니다.
집시들은 미신을 믿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스페인에만 무려 70만 명이 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 바로 안달루시아 지방인데 플라멩고는 집시 문화와 이슬람, 가톨릭 문화까지 혼합되어 안달루시아 지방의 특별한 하나의 예술 문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합니다.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집시들은 시민권을 가질 수 없어 학교교육도 받을 수 없고 의료 등 각종 사회복지의 혜택도 누릴 수 없다 합니다. 더구나 대부분 주거지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아직도 산기슭에 동굴을 파고 생활하는 경우도 많다 하는데 실제로 어느 산 중턱을 지나다 집시들이 굴을 파고 기거하는 집시 동굴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플라멩고 하면 빨간색에 하얀색으로 만든 주름 잡힌 치마를 입고 열정적으로 춤추는 무희를 떠올리게 마련인데, 플라멩고는 노래, 기타, 춤 및 박수 4개의 요소가 결합돼 만들어진다 합니다. 가수가 노래를 할 때나 무용수가 춤을 출 때 나머지 공연자들은 기타를 치거나 손뼉을 치며 노래하는 중간중간에 할레오(장단을 맞추어 지르는 소리) 등 추임새를 넣고 흥을 돋우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무대 가까이에서 관람을 하니 가수의 노래와 멜로디에 집시의 한과 설음 그리고 울부짖음에 가까운 절규를 들을 수 있었고 공연을 보는 내내 가슴속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슬픔이 차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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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용수가 춤을 추는 중 바닥을 발로 쿵쿵거리는 동작이 굉장히 많은데, 이는 집시들의 한을 표현하는 동작이라고 합니다. 이 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신의 심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현지인의 설명에 따르면 세상살이가 힘겨워 신에게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며 그곳으로 가기 위한 도약의 몸짓으로 수천 번의 발을 구르고 날갯짓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면서 아무런 희망도 없고 미래를 꿈꾸지도 못하는 그들의 삶의 현실을 처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 그들의 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에 알함브라 언덕에서 제 인생에서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마주했습니다.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였는데 집시들의 공연을 보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슬픔이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되어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순간에 보았던 낙조이기에 가장 기억에 남고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라나다 플라멩고 공연을 본 후 나라 없이 떠도는 민족이 겪는 고통을 생각하고 내 나라에서 희망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새삼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보다 가진 것에 행복을 느끼며 사는 하루들을 보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