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의 행보

by 수딩얼쓰

쓰는 걸 좋아했다.

학교에서 매일 만나 얼굴 보며 말로 해도 될 것을 뭘 그렇게 써서 친구에게 주었던지.

그때는 내가 쓴 쪽지 같은 편지를 친구에게 주고 친구가 쓴 쪽지를 받는 것이 지루한 학교생활 중 가장 설레는 일상이었다.

말로 전할 수 없는 어떤 감성을 친구에게 오롯이 전하고 싶은 여학생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 ‘써서 은밀하게 건네는 것’이었기 때문.

전화로 2시간을 얘기하고도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는 여느 유머처럼 얼굴 보며 말로 할 얘기와 글을 써서 주고받는 얘기는 뭔가 다른 것이었나 보다.

친구에게 무언가를 써서 주고 싶을 때 그 시절의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랬듯 어디에다, 어떤 종이에다 쓰는지가 중요했다.

줄이 있는 편지지에 쓸 건지 캐릭터가 그려진 메모지에 쓸 건지, 캐릭터는 너무 흔하거나 가볍지 않으면서도 감각적이어야 했고 색감은 또 파스텔 톤이면서도 촌스럽지 않아야 했다.


어떤 때는 여행지에서 사 온 그럴싸한 엽서에 한껏 멋을 부려 시도 아니고 편지도 아닌 그 무엇을 몇 줄 썼다. 친구에게 건네면서 마치 내가 너를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알겠지? 하는 표정으로 그걸 당당히 내밀고는 했다. 유치뽕짝.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과정이 우리가 우정을 지키는 데에 아주 특별하고도 중요한 이벤트로 인정되던 행위였다.

조금 더 큰 다음에는 다이어리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비교적 오랜 기간 다이어리를 썼다. 매일 서너 줄씩 오늘은 그랬네, 사는 건 어쩌면 여행이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해가며 기록을 남겼다.

그래서 매년 연말에는 내년도 다이어리를 사러 서점에 가는 것이 한 해를 미리 준비하는 배운자의 태도이며, 젊고 스마트한 직장인의 리추얼이라 여겼었다.


내가 그렇게 쓴 다이어리는 나의 가장 오랜 친구에게 읽을 거리였나 보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내가 모아 놓은 다이어리를 소설책 빌려가듯 좀 가져가서 읽고 주겠노라며 몇 연차를 가져가곤 했다. 너무도 당당해서 거절할 수도 없게 말이다. 내 일상이 궁금했던 걸까.

지금은..

지금 내 다이어리에 쓰여 있는 글은 마켓** 49,500원,연세피아노 150,000원, 센트* 29,000원..

이 보다 일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을까? 정말 훌륭한 다이어리다. 그런데 그마저도 펜을 들고 지면에 쓰는 일이 줄어들었다. 가계부 어플을 사용하면서부터는 카드 결제를 하면 자동으로 어플에 기록되는 바람에 쓰는 일이 무용해졌다.

쓰는 일이 자꾸 줄어든다.

안 쓰고 살아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 심지어 AI와 빅데이터는 내가 무얼 쓰지 않아도 어딘가에 내 일상을 기록하고 정량적으로 변환도 해준다. 편리하고도 무서운 세상! 그런데 요즘 또 글쓰기가 유행이라네?


이제 보니 사람들은 SNS에 일상에 관한 사진을 올리고 헤시태그를 달아 글을 쓴다.

펜을 들고 지면에 쓰는 글이 아니라도 온라인 어딘가에서 사람들은 계속 무얼 쓰고 있었다.

잘 쓰는 사람, 꾸준히 쓰는 사람들이 강연도하고, 출판도 하고, 인플루언서도 되고, 사회에 영향력도 행사한다. 쓰는 것의 힘은 계속 발휘되고 있었던 거다.

나도, 다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최근 SNS를 시작하면서 어딘가에 내 마음과 생각을 내어 놓으니 일상이 조금 단정해진 기분이다.

읽고 쓰는 사람으로 조촐하고 단정하게 인생 중반기를 살아 내고 싶다. 쓰는 사람의 행보를 나도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