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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일없이사는사람 May 01. 2024

글 깎는 노인

글 쓰기와 퇴고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 글을 쓰는 것은 어렵다. 

처음 쓰는 문장은 비문도 많고 너무 장황하거나 모호할 때가 많다. 

일단 분량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의미 있는 내용을 넣기 위해 적당한 길이의 글을 쓴다. 

하고 싶은 말은 다 쓴다는 느낌으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나면 기운이 빠진다.


이제 퇴고의 시간이다. 

어색한 부분을 고치고, 누락된 부분을 채워 넣고,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한다. 

이 때는 재미있다. 

어느 정도 형태만 깎아 놓은 석고를 다듬어 매끈하고 섬세한 모양을 만들어 넣는 느낌이다. 

마지막으로 맞춤법 교정을 하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문단 편집을 하면 하나의 완전한 조각상이 만들어진다. 


발행했을 때의 독자 반응은 모르겠다. 

자기만족을 위해 쓴 글이 내 손을 떠났으니 정신 건강을 위해 너무 신경 쓰진 않는다. 

하지만 퇴고의 즐거움은 계속된다. 


'결함을 발견하고 수정한다'  


며칠이 지나서 읽어도, 또는 두 번, 세 번, 계속 읽어도 수정해야 할 부분이 보이면 기쁘게 수정한다. 

99점의 상태로 완벽한 글을 한 번에 탄생시키기엔 내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일필휘지'라는 말처럼 한 번에 멋들어진 문장을 힘들이지 않고 써내려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 일주일, 한 달 후에 다시 읽어 보면 그때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결함이 보이는 수도 있다. 

수없이 많이 고치다 보면 최초의 문장은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방망이, 아니 글 깎는 노인이다. 

'쓰다'보다 '깎다'가 더 어울리는 글 쓰기 과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글을 읽고 수정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아마 종이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썼다면 불가능했을 작업이다.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실컷 글을 쓰고는 원고지 또는 편지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글씨가 개발새발이라 도무지 수습불가인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험해보지 못한 장면이다.






비슷한 예로 디지털 그림이 있다. 손 그림은 한번 붓을 대고 나면 수정하기가 쉽지 않다. 

유화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연필이나 펜을 사용한 드로잉이나 수채화는 경험 상 깔끔하게 수정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한 번의 붓질을 위해 고심하고 종이에 붓을 대면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 그려낸다.


하지만 디지털로 옮겨감에 따라 이런 작업들이 매우 쉬워졌다. 

지우개 툴로 일일이 지우고 펜 툴로 다시 그리지 않아도 된다. 

편집 툴이나 수정 툴로 몇 번의 클릭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그림이 탄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림을 못 그리던 사람이 디지털 그림을 단번에 잘 그리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잘 그려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필요한 수고는 줄었을지언정 그 과정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 방법이 바뀌었다.

단 한 번의 완벽한 붓질 대신 수백 번의 미세한 수정이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그림도 '그리다'가 아닌 '깎다'가 된다.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며 느끼는 것은 스스로 '조급함'을 버리는 것이다.

완벽한 작품을 빠르게 써낼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애초에 그런 기술은 갖추지 못했다. 


깎는 작업은 오래 걸리고 고되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버티고 버텨서 끝내면 결과물이 나온다.

그래서 재미도 있다. 

영원히 초심자일지라도 이런 작업 방식에서 재미를 찾고, 그 재미로 계속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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