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인 캐릭터라는 말 누가 처음에 했는지 몰라도 참 잘 만든 것 같다.
누구나 미술 수업 시간에 한번쯤은 보았을 석고상을 생각해 보자. 실제 사람과 똑같이 생긴 것보다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면으로 잘게 나눠져 각지게 생긴 석고상이 좋겠다.
수 없이 많은 면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모양의 석고상은 어느 방향에서 보는가에 따라 볼 수 있는 면의 개수가 다르다.
사람이 갖고 있는 면이 100가지라면 누군가는 평생 그 사람의 1가지 면만 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89개 정도는 볼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한쪽 얼굴만 보여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내가 주변에서 움직인다 한들 나는 반대쪽 모습을 알아채기가 힘들 수 있다.
비슷한 방향에 있더라도 미묘한 각도의 차이에 의해 동일한 면에 대해 누구는 '밝다' 누구는 '어둡다'라고 명암을 다르게 인식할 수도 있다. 실제로 빛이 고정된 상태에서 사람이 움직이며 석고상을 본다면 잘게 나눠진 면들의 밝기는 시시 각각 변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으면 그 사람이 바뀌는 모습을 보기 힘들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가족, 친구, 동료들도 내가 그들을 보는 면과 전혀 다른 면을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가끔 석고상의 관찰자들끼리 이야기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한 없이 따뜻하고 인자한 할머니가 자식들에게는 장성한 자식도 당신 품 안에서 원하는 대로 쥐고 흔드려고 하셨던 권위적인 어머니였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 참지 않고 다 하던 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가족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해 혼자 우울증을 앓고 있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꽤 오래되었는데 최근에서야 이모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나눌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언제나 손녀를 끔찍이 사랑하시고 아껴주신 분이었다. 이모 기억 속의 할머니는 자식들이 당신 뜻대로 움직여주길 원하시던 집안의 독불장군이셨다. 이모와 어느 정도 나이차이가 있는 엄마가 생각하는 할머니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100가지 면을 다 안 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누군가를 속속들이 알고 싶다는 말은 오만한 욕심이기도 하다.
다 알게 되면 나는 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만하며 그의 약점을 마뜩잖아할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조차 이미 알고 있다 생각하여 더 이상 의견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르는 면이 있으니 존중하고 소중히 대하게 된다.
몰랐던 면을 알게 되면 호들갑을 떨며 놀라지 말고 '아, 그랬구나' 하고 이해해 주면 된다. 혹시 그로 인해 그동안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쌓였던 오해를 풀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