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9일
▲뉴턴의 사과나무, 어떤 사람들은 일상에서 심오함을 본다. 뉴턴이 그랬다.
지난달 20일, 나는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었다. 옥스퍼드처럼 전형적인 대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로 학생들이 그야말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다. 학문의 도시답게 과거로 현재로 미래로 끊임없이 활동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어느날 갑자기 2차세계대전 '숨은 여성 영웅들'이 대서 특필되며 조망 되기도 하고, 로잉의 원조이자 조정 경기의 나라답게 옥스퍼드를 제끼고 남녀팀이 조정 경기에서 동시에 1등을 하면 템즈강을 '푸른피(케임브리지 학생들을 상징함)물들였다'라는 이유만으로 펍에서 파인트를 한 잔씩 돌리기도 한다.
정부와 산업계가 2040년을 목표로 혁신 허브 산업 지역을 조성하고 있는 곳이자 올해는 'Here is a Gale Warnig'를 표어로 기후-불평등-폭력 등 영속성의 위기에 반응하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선다. 이에 질세라 교수들과 각종 인권/환경 단체가 이에 응답한다.
▲피츠윌리엄 뮤지엄박물관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은 피츠윌리엄 박물관으로 미이라와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와 고시대 중국 유물부터 근세와 현대의 유명한 화가와 작가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소장품이 50만 점이 넘고 웬만한 나라의 국가박물관 규모보다 크다. 케임브리지대학교가 운영하고 있는데 영국의 대부분 박물관이 그렇듯 입장료는 무료다.
박물관 자체가 영국의 1급 문화재로 모네, 피카소, 고흐, 샤갈, 드가, 르누아르 등의 거장의 그림과 타치아노, 반다이크, 렘브란트, 루벤스, 터너 등의 그림이 향연을 이룬다. 그림 한 점, 조각 하나가 초대받은 응접실에서 편하게 맞아주는 기분을 들게 하는 배치의 배경에는 틀림없이 섬세한 사람들의 손길과 세월이라는 시간이 담겨져 있으리라.
▲모딜리아니의 그림눈동자가 없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연인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케임브리지에는 베니스의 운하를 즐기는 것보다 더 멋진 리버 캠에서의 펀팅(학생과 가이드가 배를 모는)이 있다. 폴(장대)로 배를 미는 멋진 청년이 케임브리지의 일화를 들려주는데 리버캠을 따라 트니니티 칼리지와 세인트 존스 칼리지를 보는 장소가 펀팅의 하이라이트다.
뉴턴이 나사없이 물리력만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나무 다리도 지나간다. 배에서 내려 조금 걸으면 트리니티 스트리트를 건너 마켓힐에 도달할 수 있고, 다시 걷다보면 뉴턴의 사과나무를 거쳐 밀로드에 도달하는데 먹거리나 빈티지 숍 같은 것들이 잔뜩 있어 지친 몸에 에너지를 불어 넣을 수 있다.
영국에서는 나도 모르게 길거리나 공원에서 털썩털썩 주저 앉아 사람들을 보곤 하는데, 점잖하게 다니는 서울에선 하지 못하는 행동이 불쑥 나오는 것이 흥미롭다.
▲리버 캠의 펀팅사공은 노를 젓고 광대는 공을 돌리고
언제나 하루는 시작되고 뉴스나 밤 사이 소식 등 다시 많은 것들을 연결시킨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때론 소속된다는 것이 안도감을 주기도 하는데 케임브리지에서 특이한 점은 어느 골목이든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아시아인들이 많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정확히는 중국인들이 많다.
학생들로 말미암은 가족들, 이에 따른 사업을 하는 중국 사람들. 목소리에 성조가 있어 다소 목소리가 크게 느껴지곤 하는. 이건 내가 한국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무리에 스며드는 교육을 받았고 개성을 강조하는 문화는 터부시하기도 했었으니까.
▲케임브리지 골목길고즈넉한 길. 모던한 길. 두갈래 길.
문구회사 톰보우(Tombow)의 유명한 카피가 있다. "지우는 것은 쓰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울림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쓸 것인가. 꿈은 지워지지 않는 밤하늘의 별과 같다. 사람이던 무엇이던 한때 꿈이었던 것들은 저마다의 자리로 흘러 간다.
어떤 것은 깊숙이 가라앉기도 하고, 어떤 것은 멀어졌다가, 또 어떤 것은 곁에서 계속해서 빛난다. 만 킬로미터쯤 떨어진 케임브리지의 골목에서 그 조각들을 맞춰본다. 그리고 꿈의 중심에는 언제나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만엽집의 그 누군가의 기다림의 대상처럼, 어쩌면 오늘 저녁에 찾아올 작은 만남이자 소중한 인연처럼.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렇다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 <만엽집 2513번>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며,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나는 이곳에 머무를 겁니다." - <만엽집 2513번>에 대한 답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