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일
도처에서 예술을 말하는데 직관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오랫동안 예술에 대해 묻고 생각해 보았는데, 현재까지 나의 정의는 이렇다. 예술이란 본질을 깊이 꿰뚫는 힘 같은 것이라고. 본질은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에 깃들어 있고, 이를 표현하고자 함이 예술의 시작점이다.
한 사람의 삶도 예술이 될 수 있고, 실재하는 모든 대상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전성기 시절 박지성의 축구는 예술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우리 함께 가자'라는 깊은 메세지 담긴 연설은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아이가 처음 발성하는 '엄마'라는 단어는 부모에게 예술을 넘어선 벅찬 감동이다. 가공품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유행하는 캐릭터 라부부나 몰리 같은 캐릭터도 예술품이 될 수 있느냐 물어본다면 나는 그렇다고 본다. 본질을 포착해 표현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질문을 던지는 것. 나는 그것이 예술의 시작점이라 생각한다.
회화 예술의 향연이 펼쳐지는 대표적인 곳이 미술관이다. 나는 어떤 나라나 도시를 방문할 때 미술관을 꼭 찾는다. 지난 21일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에 다녀왔다. 최근 몇년간 테이트 브리튼에 여러 번 갈 기회가 있었는데 똑같은 작품을 계속 관람해도 한번도 지루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까지 영국의 국립 미술관이었던 테이트 브리튼은 영국 전역에 있는 테이트 계열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 테이트 리버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와 함께 테이트 계열 미술관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헨리 테이트 경이 설립한 테이트 브리튼은 튜더 왕조(1485~1603년, 헨리7세~8세,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시기 미술 작품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19~20세기 유럽 미술 작품까지 상당히 많은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가인 터너의 작품을 대량 소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술관 건물은 외관, 내관 모두 모던하고 심플하다. 현대 작품을 주력 전시로 하는 테이트 모던은 테이트 브리튼에서 템즈강 건너 대각선편에 있는데 도보로는 20분, 우버보트(배)로는 10분 정도 걸린다. 테이트 모던에서는 좀 더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때론 유머러스한 작품들이 전시되곤 한다. 예를 들면 공중에 사람보다 큰 방울 풍선이 떠다니거나, 가상 캐릭터들이 VR로 미술관 곳곳에 홀로그램으로 깜짝 전시되는 등의 형태다. 이는 난해한 추상 작품의 해석을 상쇄하고 미술관 관람의 허들을 낮추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론 추상 작품은 힘을 빼고 가볍게 나만의 시선으로 보고 자신만의 시야로 의문을 가지고 해석하면 된다는 미술관 측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테이트 브리튼은 1500년부터 현재까지 영국 미술 작품을 주력으로 전시하면서 유럽 대륙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들도 다수 전시하고 있다. 세계 정상급 예술가인 데이비드 호크니, 피터 블레이크,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늘 볼 수 있고, 그 유명한 존 에버렛 밀레의 <오필리아>, 피터 폴 루벤스의 <연회장 스케치>, J. M. W. 터너의 <골든 보>, <노엄 성>, <선라이즈> 등이 있으며 샤갈, 고흐, 르느와르, 세잔, 피카소 등 세계 정상급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곳곳에 있다.
이런 작품 앞에서 수십 분, 길게는 1시간 동안 그림을 마주하는 사람을 본다. 어떤 관람객은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마치 마음 속 소원이 이 한 점의 그림을 보길 원한 것처럼 그렇게 본다. 내겐 그런 광경도 미술관의 숨겨진 매력이다. 타인의 고양된 감정이나 행복을 따뜻하게 바라만 봐도 마음의 어딘가 데워진다. 이런 것이 예술이 가진 전이성의 힘이라 생각한다.
▲그림을 관람하는 소녀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니. 소중한 아이들의 시간과 마음을 응원한다. 언제나 그대로. ⓒ 노태헌 관련사진보기
예술이 보내는 주파수와의 공명은 우연히 일어난다. 세상 이치 중 하나는 어떤 우연도 필연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우연히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가듯, 예술과의 공명도 우연히 태동된다. 태동된 무언가는 에너지를 가지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라디오에서 수많은 종류의 음악이 흘러나오다 어느 순간 특정한 곡, 특정한 리듬, 마음을 사로잡는 목소리에서 자신만의 음악과 공명 하는 소리의 진동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 울림은 끊임 없이 이동하여 마음 속 깊은 곳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것을 건드리고 특별한 존재의 심원에 다가간다.
소중한 떨림은 그 누군가를 내가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누군가가 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의 파동이 양자 사이를 오가며 보이지 않는 연결의 끈을 이어준다. 서로간의 공명은 우주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그 균열 속에 창조가 있고, 태동이 있고, 사랑이 있고, 감정이 있고, 생명이 있다.
테이트 미술관에서 꼭 찾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고흐가 1889년 프랑스 남부 생레미 요양원에서 그린 밀밭과 사이프러스(Wheat Field with Cypresses)라는 그림이다. 한편의 화폭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고, 바람이 있고, 하늘과 구름이 있다. 테이트 브리튼에서, 테이트 모던에서 한참을 서 있기도 하고 그림 근처에서 털썩 주저 앉아 오랫동안 들여다 보기도 했는데 이 그림을 왜 이렇게 오래 들여다 봤는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유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이 작은 캔버스에 투여된 고흐의 따뜻한 영혼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 그림이 심장 어딘가에 잘 놓여 있다.
가난해서, 물감이 없어서, 채색을 충분히 할 수 없었던 그의 애달픈 흔적이 그림 구석 구석에서 보인다. 다른 화가의 작품에 비해 너무 작은 캔버스, 하지만 그만이 가지고 있는 화풍과 강렬한 색,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조화와 함께 고흐만이 품을 수 있는 인류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작은 그림에 가득 담겨 시대를 건너 전해 온다.
회오리 치는 붓질 속에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내면의 불길 같은 것이, 딱딱하고 차가워진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작은 불씨를 붙여주는 느낌도 든다. 냉랭하지 말고 조금 더 따뜻해져도 괜찮다고 말을 건낸다. 이 그림을 보면 마음 속으로 하나의 따뜻한 별 같은 존재가 어깨 너머 기대 오는 것 같다.
흔들리는 하늘, 밀밭 위로 불어오는 바람, 세상에 길들여 지지 않겠다는 고흐의 의지, 내가 가장 힘들어도 당신들에겐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주겠다는 그 마음. 전쟁에 대한 뉴스를 보아도 무감각한 이상한 세상에서 사랑과 온정을 건네고 싶은 그의 마음이 시대를 넘어 어딘가로 흐른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고 구름과 하늘이 넘실거린다. 희망이 하늘로 솟구친다. 바람은 물결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선명한 감각 속에서 언젠가 나도 그런 따뜻함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길 바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가치 중 가장 고귀한 하나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따뜻하게 안아주는 치유와 자유를 향한 저항의 가치, 그리고 근원적인 것들의 연결됨이 예술이라는 단어에 깊게 배어 있음을 느낀다. 예술은 본질을 전하는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이 된다. 그 불씨가 세대를 건너 소중한 가치를 전한다. 각자만의 특별한 예술 작품은, 그리고 각자의 삶은 그렇게 전승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