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유디트 헤르만

2025년 9월 17일

by Taehun Roh

많은 것들이 붕붕거리며 열기를 더하고 모호함으로 들어갈때 나를 침전하게 만들어 주었던 이야기. 2025년에 유디트 헤르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좋았다. 관계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삶이라는 시간을 통과해내는지 그리고 통과한 관계는 더이상 이전의 것 혹은 미래의 것이 아니게 되는지. 그녀가 메리 올리버를 읽었는지는 잘모르지만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이 떠올랐다. 근래 많은 것은 연결되어있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래, 사람과 책과 문명에 빚지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 많은 나날들 역시 함께했던 많은 사람들의 주고 받은 영향이 시공간이라는 무대에서 서로 스며드는 것이었겠지. 한 사람의 실루엣 뒤로 다른 한 사람의 실루엣이 겹쳐지고 목소리가 있고 주제가 있다. 찾아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는것이 좋을까. 아니면 선명하게 하나씩 그려나가는게 좋을까. 나는 모른다. 그걸 알기 위해 시간안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택과 행동에는 본능이라는 것이 좀더 나를 이끌었다. 유년시절 나는 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좋아하는 것은 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았다. 시험과 해야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이 나라는 필터를 통과하지 못했다. 친구나 사람에 대해서도 그랬다.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는 이는 아무리 주위에서 말해도 관심이 없었다. 배우나 가수보다 일상속 엘레베이터를 가끔 함께 타는 뭔가 특이점이 있는 사람이 더 눈길이 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내안에는 수많은 내가, 나타나지 않은 내가 있다 했다. 나타나지 않은 나는, 가능성은, 빨간코트의 여인처럼 어느날 문득 나타나 마음을 이끌고 새로운 문을 두드리고 그동안의 것들의 채색을 그레이로 만들어버린다. 한권의 책도 그렇다. 유디트 헤르만의 이야기도 그랬다.


<책속으로>

모든 이야기에는 첫 문장이 있다. 책 속 이야기가 시작하는 문장이 아니라, 내 머릿속 이야기가 시작하는 첫 문장 말이다. 가끔은 어떤 이미지 또는 순간, 무언가를 향하거나 무언가에서 떨어지는 시선. 하지만 대개 그것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듣고, 불과 몇 초일 뿐이지만 그동안에 명확하고 몸에 바로 와 닿는 감각을 느낀다. 어떤 전율, 예감, 소름이. 한편에는, 그렇다, 말해진 것이 있다. 정보, 주장, 견해 또는 질문, 죽 늘어선 몇 마디 말들, 마침표 또는 물음표 또는 줄표. 그리고 또 한편에는 말해진 것의 아래나 위에 완전히 다른 것이 있다. 이중의 바닥, 내가 알지 못하는, 그저 예감만 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암시. 누군가가 이것을 말하지만 실은 다른 것을 말하는데 그 아래에서 본인도 전혀 모르는 제3의 것을 말하고, 그것이 내 앞을 지나가고 맨 마지막 순간에 내가 그것을 붙든다. 나는 그것을 집어 챙겨 둔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이 문장을 말할 수 있는 그 하나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 이는 동경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감각의 기록과 결부되어 있고, 어쩌면 깨달음과도 결부되어 있다. 해답은 아니지만 접근과. 우리가 수년 전에 행하고 생각했던 일들이 마치 길게 이어지던 음파가 급변하듯 돌연 그리고 완전히 뜻밖에 결말을 드러내고, 아무리 하잘 것 없을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결과다.


그러니까 이 첫 문장이 내 머릿속에 있다. 이어서 이 문장을 위한 자리를 찾고, 언젠가는 이 문장을 위한 자리를 찾고, 언젠가는 이 문장을 실제로 말하는 인물이, 그리고 실제로 이 문장의 대상일 수 있는 다른 인물이 생겨난다. 이어서 이 두 인물이 앉아 있는 탁자가, 이 탁자가 위치한 공간이, 이 공간이 위치한 집이 있고, 둘 중 한 인물은 이 공간을 떠나서 십중팔구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문틀의 빛속에 그토록 많은 황금빛 눈. 존 번사이드가 <무슨 빛이 있는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는 처음으로 말해진다. 혹은 달리 표현하면, 그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말처럼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으며, 이야기는 말해진다. 그리고 또 다르게 표현하면, 라르스 구르타브손이 말하듯 하나의 인생에서 모이는 이 모든 것.

그것들에 의미를 실으라.

드레휘스 박사의 소파에 눕던 시절에 나는 그에게 나에 대해 서술하거나 나에 관해 말했다. 결국 내가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멋대로 말할 수 있다.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마.

내 가족의 이야기들 - 내게 전해진 이야기들, 그리고 내게 전해지지 않은, 그러나 내가 예감하던 이야기들. 나 자신의 이야기들, 하지만 전혀 내것이 아니며 먼 과거의 불확실로부터 지금 여기를 거쳐 불분명한 미래를 향해 가는 불안한 발자취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 내가 분석 중에 말하던 방식이 어떤 이야기를 쓸 때와 같았던 게 떠오른다. 나는 시작점을 찍고 거기서부터 과거의 밀림 속으로 길을 내며 들어간 다음에 결론 없이 밀림에서 다시 나와 시작점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과거의 모든 것에 매여 있는 현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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