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시즌즈 호텔 찰스H, 그리고 스토9

이렇게 둘이서

by Taehun Roh


프루스트는 어딘가에서 "두사람이 서로에 대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은, 설사 연인 사이라도, 똑같지 않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연인사이라도’를 ‘특히 연인사이에서’로 바꿀수도 있을 것 같다.


영원한 무에서 와서 영원한 무로 돌아가는 삶속에서 무엇이 중요하다고 내게 묻는다면 단연 나는 그것을 ‘이야기’라 생각하고 있다. 현재까지 모든 것을 넘어 삶의 이야기, 너와나의 이야기,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의 이야기라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 매일 어떤것들이 연결되길 원한하는데, 이곳에는 사람이 있고 인터넷이 있고 잠과 무의식이 있도 있다. 그리고 식물들을 포함해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생명이 있다. 요즘에는 생명이 없는것들을 - 게임/인터넷등 - 생명이 있는것처럼 여기기조차 하지만. 이런 삶 속에서 문득 기억조차 남지 않게 될때가 오면 과연 어떻게 되는것일까 같은 질문들이 떠오르곤 한다. 수면 밑에 있는 질문들.


2025년 가장 유의미한 시간을 가지고 소중한 대화를 한 L과 광화문 어느 빌딩 커피숍에서 만나 - 이날 비가 오지 않았는데 우산을 들고 다녔고, 그 우산은 결국 잃어버렸다 -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안국역 좁은 골목길에 있는 스토구에서 간단한 일본식 요리와 하이볼을 마셨다. 그리고 찰스H로 갔다. 스피크이지바로, 지하일층 비밀의 문(아무런 표시가 없는 마치 창고로 쓰일만한 문)을 열면 조용한 재즈 클럽 같은 분위기 펼쳐진다. 웨이터들이 친절하고 테이블과 쇼파가 공간을 넓게 사용하여 프라이빗한 대화를, 추억을 불러일으킬만한 대화의 소재를 분위기로 제공하는 공간이다. 그날 우리는 와인을 마셨다. 한잔을 마시고, 또 한잔을 마시고 레드와 와이트를 번갈아가며 마셨다. 이런 공간에 들어온 신비한 느낌을 가지고 가을이기도해서 영화나 책 이야기를 했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했고 이런 공간을 좋아할 만한 또다른 사람과 함께 오면 그 사람이 좋아할것 같다고 L은 이야기했다. 그 후, 그 분과는 셋이 문래동에 있는 어떤 위스키바에 갔는데 스트레이트 한잔을 마지막에 실수로 엎질러 실망한 기억이 난다. 그때 착하게도 L이 따뜻한 말을 건냈다. 사람을 안심시켜주는 특유의 미소를 순간 본 나는 이사람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사람의 눈이 가끔 반짝이게 보일때가 있는데 광화문의 스피크이지바에서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처럼 기억한다. 이런 기억은 언제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싶다.


눈을 오랫동안 감고 보이지 않았던 광경들이 밀려오면 밀려옴의 잔상이 눈을 떴을 때 눈앞에 펼쳐지기를 원할때가 있다. 희망대로 되지 않는 현실속에서 그런 꿈같은 일이 드물지만 나는 요즘 그런 광경들이 틈틈히 이어진다. 공백들이 채워지고 여백에는 포근한 색깔도 있다.


문답을 나누는 일. 수많은 질문들이 부상하고 알고 싶은것과 알려지고 싶은것, 이 경계에 L이 있다. 나는 학창시절과 같은 캐터빌러로 돌아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다. 그리고 하나의 서약. 어쩌면 지켜질 수 없는 서약 같은것을 한다. 어려움에 확률을 건다. 그건 정말 의미있는 일이니까.

나쓰메 소세키가 한말 처럼 한 겹의 삶은 없다. 한낱 지나간 시간이 현재를 덮쳐 오고, 저마다의 사는 일이 교차하고, 나는 마음의 이쪽저쪽을 쉴 새 없이 오간다. 그 사이 삶에는 오랜 행복의 덮개가 쌓인다. 두 겹, 세 겹, 네 겹... 높기보다는 깊은 층. 사람들은 그것을 삶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쌓아 놓기만 할 뿐 하나하나 들추어 보지 않는 탓에, 그러자니 겁나는 탓에, 겹겹이 층을 이룬 단면을 볼 일이 별로 없다. 오히려 거대하게 뭉친 하나의 덩어리가 삶이려니. 그런데 사람들은 왜 깜짝 놀라는가. 익숙한 덩어리에 작은 겹이 덧대어질 때, 왜 처음처럼 허둥될까. 왜 그것은 삶의 외부가 되는걸까.


이 이야기는 영화 부고니아로 이어질 것 같은데 그렇게 하나둘 이어지는 것이 늘어나면 다른 문을 언젠가 찾을지도 모른다. 특별한 문. 특별한 손잡이. 특별한 사람. 이어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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