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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바 Jun 09. 2024

반복되는 실패에
낮아지는 자기효능감

신입 개발자의 제로투원 이야기 (1)

저는 현재 회사에서 VOC STUDIO 라는 VoC (Voice of Customer) 취합, 관리, 분석 B2B SaaS 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 발굴부터 서비스 유료화까지 모든 과정에 참여했기에 많은 애정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는 서비스인데요.


너무 익숙해서 였을까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포기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합니다.” 라는 제 블로그의 주제에는 회사에서의 고군분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무모한 이야기를 재밌어하고, 이에 자극을 받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을 시작으로 회사에서의 제로투원 여정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이어지는 글은 독백의 느낌을 주기 위해 평어체로 작성합니다.


1편) 반복되는 실패에 낮아지는 자기효능감

2편) 낮은 사용자 이해도,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3편) TBU

4편) TBU




의지 경영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의지 경영” 이라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한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능력/실력/노력 (이하 “역량”) 을 가진 구성원이
사용자/팀워크/성장 (이하 “핵심가치”) 를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조직 문화는 아래와 같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람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위대한 일을 해낸다.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역량을 가진 구성원이 핵심가치를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이러한 조직 문화에 기반하여 회사는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 구성원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장려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 구성원은 역량이 있어야 하며, 핵심 가치를 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회사의 구성원 누구나 새로운 팀을 구성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할 수 있다. 그렇게 실제로 많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고 없어지고를 반복해 현재 4개의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모두 구성원 누군가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심지어 인턴의 제안으로 시작된 서비스도 있다.



여기까지가 현재 우리 회사의 조직 문화이다. 한국에서는 독특한 조직 문화이기에 한 번 소개하고 싶었고, 내가 회사에서 제로투원을 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배경이기에 정리해 보았다.




첫 시도, AI 옷장 프로젝트


2022년 4월, 당시 참여했던 크래프톤과의 한국어 LLM 개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나서 나는 다음 행선지를 고민 중이었다. 많은 고민 끝에 결국 아래와 같은 이유들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 내가 처음 시작한 서비스로 돈을 벌어보고 싶었다.

2. 성과를 내며, 구성원이 크게 성장하고,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팀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다음 날부터 한 명의 팀원과 함께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다. 아침에 회의실에 앉아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런 것은 어떨지, 저런 것은 어떨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꼭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수많은 예선을 거쳐 처음 나온 아이디어는 에이클로젯 와 같은 AI 옷장 서비스였다.



위와 같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사내에서 검증도 해보았다. (지금 보니 참 엉망이다. 대학생 과제 수준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사내에서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직접 메시지를 보내 AI 옷장의 아이디에이션을 도와주시기도 했고, 옷과 패션에 무지한 두 명의 개발자를 위해 시간을 내 인터뷰에도 많이 응해주셨다. 덕분에 힘이 많이 났다.



그러나 결국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구성원의 희망회로가 돌지 않아 금방 중단하게 되었다. 여기서 희망회로란 ‘이 프로젝트가 될 것 같은 직관적인 감이자 근거’ 이다. 우리의 첫 시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에게 던지는 질문, 돌아가면 ‘옷장’ 다시 할 것인가?


하지 않는다. 나는 옷과 패션에 관심이 없기에 내가 잘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기술에서 시작했던, 멀티 유니버스 챗봇


이후로 여러 아이디어를 구체화해 보고 포기하기를 반복하다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NLP 기술을 활용해 보자는 결론에 달했다. 당시는 이루다 2.0, Replika 와 같은 오픈 도메인 챗봇 서비스들이 부상하기 시작할 시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 시장에 도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실질적인 고민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챗봇” 이 당시 우리 팀의 생각이었고 그 순간 떠올랐던 것은 오은영 박사님이었다. 오은영 박사님이 옆에 있다면 초보 부모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드니, 닫혔던 댐이 열리듯 생각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강형욱 씨가 옆에 있다면 내 강아지의 생각을 물어보고 싶다.

인생에 고민이 있을 때 니체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워렌 버핏이 내 투자 포트폴리오에 조언을 해줄 수 있다면 수익률이 더 높았을 텐데..


서로의 생각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말하기 힘들거나 정답을 얻기 어려운 고민들에 대해 공감하고 얘기할 수 있는 AI 챗봇들을 주제별로 하나씩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신나게 아이디어를 구체화했고 나중에는 사용자가 만든 AI 챗봇의 수익을 정산받는 앱스토어 BM 등 아주 김칫국을 냄비 째 들이켜다.



그렇게 구체화된 멀티 유니버스 챗봇 아이디어를 검증받았고 감격의 첫 통과를 얻어내었다.

(당시는 처음 시도했던 AI 옷장을 포함한 모든 아이디어들이 부적격 판단을 받은 상태였다.)



이어서 설렘 가득한 상태로 2022년 4월 15일, 슬랙 채널을 개설했다. 우리는 말하기 힘들거나 정답을 얻기 어려운 고민을 외로움이라고 칭했고, 야심 차게 “모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라는 포부를 내세웠다.



바야흐로 서부개척시대, 첫 스레드 (첫 댓글) 깃발을 꽂는 사람도 있었고, 응원의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우리 팀은 카스를 외치고 다녔다. 정확히는 Cass 가 아닌 CaaS, Conversation as a Service 를 외치고 다녔다. 말하기 힘들거나 정답을 얻기 어려운 고민들을 가지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AI 챗봇과의 대화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고 효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곧 하나의 서비스가 되리라 믿었다.



그리고 4일 뒤인 2022년 4월 19일, 한국어 AI 챗봇 모델을 만들어 슬랙에서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람들이 AI 챗봇과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지켜보며 특정 주제에 대한 대화에 특화된 오은영 AI, 강형욱 AI, 니체 AI 등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였다. 참고로 이 때는 ChatGPT 가 세상에 공개되기 전이었다.

(8개월 뒤인 2022년 11월 30일에 ChatGPT 가 처음 공개되었다.)


그렇게 일주일간 방법을 고민해 봤지만 현실적으로 구현해 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핵심적인 데이터를 준비할 방법이 없었다. 한국어 LLM 을 개발했을 때처럼,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크롤링해 학습시키기엔 인력도 자본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가슴 설레는 멀티 유니버스 챗봇 도전은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나에게 던지는 질문, 돌아가면 ‘멀티 유니버스 챗봇’ 다시 할 것인가?


한다. 당시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던 유일한 이유는 데이터의 부재 때문이었다. 2명으로 구성된, 이제 시작하는 팀이 AI 챗봇을 만들기 위해 수 억 원의 돈을 쓰기에는 겁이 났다. (회사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ChatGPT 의 등장으로 세상이 너무 바뀌었다. 누구나 적은 돈으로 그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바야흐로 대창업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이 진심으로 이해가 된다. 엔지니어 입장에서 알고리즘으로는 불가능했던 문제들이 AI 로 턱턱 풀리는 것을 정말 소름이 돋는다.


만약,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멀티 유니버스 챗봇 아이디어를 계속 개진했다면, 어떤 우주에서는 어쩌면 character.ai 같은 서비스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희망회로를 넘어서 망상회로를 돌려보면 말이다.




낮아지는 자기효능감과 우연한 기회


새로운 기회는 우연히 채널톡과의 미팅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AI 팀은 없지만 데이터는 있었던 채널톡과 할 일은 없고 기술만 있었던 우리 팀의 이해관계가 맞아, 채널톡의 상담 요약 기능을 우리 팀에서 개발해 보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심지어 우리 팀은 크래프톤과의 협업 경험도 있었기에 타사와의 협업에도 두려움이 없었다.


사실 좋은 기회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희망회로가 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채널톡과 협업해 요약 기능을 만들자고 바로 결정한 이유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검증하는 작업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론칭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2022년 4월 한 달은 3년간 회사를 다니며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시간이었다. 이때의 감정은 당시 내 회고 글에 잘 드러난다. 정확히 이렇게 적혀있다.

개발이 제일 쉽다.. 개발이 아니면 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밥값을 하고 있는 걸까?


처음에는 괜찮았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구체화하는 과정이 재밌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밥값을 못한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자기효능감이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었다. ”내가 쓸모가 있나?” 라는 감정을 살면서 처음 느껴봤고, 이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짓눌렀다. 그렇다고 마땅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며 잘하려고 노력했지만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채널톡의 상담 요약 기능이라는 기회를 우연히 만난 것이다. 심지어 그 주제 또한 대화 요약, 즉 AI 모델 개발이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을 자기효능감이 낮아지는 시기에 만난 것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격 아닌가? 이렇게 채널톡과의 협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내 생각이 반박당하는 것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 그냥 허허 실실 웃을 줄..) 어렵게 떠올린 아이디어를 말했을 때 부정당하는 과정에서 방어 기제가 자주 발동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에 긍정보다는 부정을, 강점보다는 약점을 찾아내는 것이 쉽구나.
심지어 나 조차도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그러고 있구나.


이런 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의 논리와 생각이 반박당했을 때 의식적으로 아래와 같이 스스로 되뇌었다.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디어를 공격하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는 나를 위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방어가 아닌 경청을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약점을 이해하고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내 논리는 탄탄해졌다.


또한 반대로 나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부정보다는 긍정을, 약점보다는 강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 태도 하나만으로도 나는 좋은 동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편 예고

그렇게 6개월 뒤인 2022년 10월 27일, 상담 요약 기능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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