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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이 등에 짊어진 것

단순한 번호가 아닌 꿈, 그리고 유대

by 야구소년

많은 분들께서 고시엔을 보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등번호'입니다. 기존에 프로야구에서 볼 수 있는 등번호들과 달리 일본의 고교야구에서 사용되는 등번호는 '판'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등번호가 새겨진 '판'을 유니폼에 실로 꿰매 부착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고교야구에서는 프로야구와 비슷하게 시즌 시작 전 선수들이 등번호를 정하고 이를 자수작업을 통해 제작하여 입는 방식입니다. 각 학교마다 다르게 이름이 들어가기도 하고, 등번호의 스타일과 색깔이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시엔에서는 모두가 같은 크기, 같은 색상, 같은 스타일의 등번호를 착용합니다. 어째서 일본은 이러한 등번호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2025년 센바츠 결승전, 요코하마의 수비 위치 c. virtual kokoyakyu

2025년 센바츠 결승전, 요코하마의 스타팅 수비 위치입니다. 선수들의 이름과 등번호가 쓰여있는데요, 눈치채셨을지도 모르지만 선수들의 등번호는 선수들의 포지션을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중견수로 나온 아베는 등번호 8번을 달고 있고 이는 야구에서 중견수의 수비 위치를 뜻하는 8을 가르칩니다. 등번호 1부터 9까지는 팀의 주전 선수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한 자릿수 등번호를 부여받은 선수들은 학교를 대표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 아래에 끝까지 달려갑니다.

요코하마 고교 오다 c. ameblo.jp

두 자릿수 등번호 선수들부터는 '보결 멤버' 즉, 후보로 분류됩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실 수 있는 선발 투수 오다의 등번호가 10인 것인 좌익수로 나와있는 에이스 오쿠무라에 이은 팀의 두 번째 투수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어서 11번, 18번, 등은 보결 투수들의 번호로 쓰이고 12번은 보결 포수, 13번은 보결 1루수 등으로 계속해서 후보 야수들에게 번호가 주어집니다.

고시엔의 등번호. c. 마이니치 신문

이러한 등번호들은 20번까지 존재합니다. 어느 학교이든지 단 20명만 등번호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벤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등번호를 받아 벤치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들을 '벤치 입성 멤버'라고 합니다. 부원 수가 적든 많든 벤치 입성 멤버는 20명으로 제한됩니다. 재작년 여름까지는 벤치 입성 멤버가 18인이었자만 2024년 봄부터 20명으로 확대되어 지금의 20명에 이르렀습니다. 2024년 기준으로 야구부원이 가장 많았던 학교인 히로시마 코료의 전체 야구부원 수는 146명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단 20명만이 등번호를 받아 고시엔에 섰습니다. 13%만이 경기장에 들어섰고 6%만이 경기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고교야구 등번호 부여 장면 c.마이니치 신문

등번호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등번호는 학교를, 자신이 노력해 온 시간을, 또 함께 해온 동료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 다이아몬드 에이스에서 주인공 사와무라 에이쥰이 3학년 선배 대신 자신이 벤치 입성 멤버로 선택되자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주장인 유우키 테츠야가 하는 말은 이를 실감하게 합니다.

다이아몬드 에이스의 한 장면 c.madhouse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선택받지 못한 동료들의 몫까지 강해지는 거다."


등번호를 받지 못한 3학년들의 여름은 그 순간 끝납니다. 싸워보지도 못한 채로, 진정 뜨겁게 달아오르지 못한 채로, 그들의 여름은 막을 내립니다. 그렇기에 등번호를 받은 선수들은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꼭 함께한 동료들을 고시엔으로 데려가겠다고 말입니다. 벤치 위의 스탠드에서 열렬하게, 큰 목소리로 응원을 보내주는 동료들에게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어쩌면 일본의 고교야구 소년들이 달려 나갈 수 있는 힘은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경기 종료 이후의 소년들 c. virtual kokoyakyu

등번호는 많은 의미를 가집니다. 자부심, 노력의 결과, 그리고 유대감까지. 소년들을 등번호를 달며 여러 감정을 느끼고 그라운드에서 그 감정을 쏟아냅니다. 그게 아마 우리가 보는 일본 고교야구 선수들의 열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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