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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엔에 닿은 하늘색 빛

동해를 넘어 꿈의 무대에 닿은 이들의 이야기

by 야구소년

“자고로 휘문이란 말이야 강남 8학군 노른자 땅으로서…” 프로야구에, 또 고교야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만한 이야기인데요, 일명 ‘휘랄자’, ‘휘친자’들로 불리는 선수들의 모교인 휘문고등학교에 대한 프라이드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휘문고는 전국의 많은 고등학교 야구부 중에서 단연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용택, 이재우, 임찬규, 박민우, 안우진 등 KBO를 빛낸 스타들부터 김선우, 이정후 등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스타들까지 휘문은 많은 스타들의 모교입니다.

휘문고 시절의 이정후

이러한 휘문은 대통령배 2회 우승, 청룡기 2회 우승, 황금사자기 1회 우승, 그리고 봉황대기 3회 우승 등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한 전국의 몇 안되는 고교 중 하나입니다. 이에 더해 야구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도 매우 뛰어나고 국회의원, 시장, 그룹 회장 등 대한민국의 굵직한 곳들에 휘문고 출신 인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시엔

그런데 이런 휘문고 야구부가 고시엔에 나간 적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믿으시겠나요? 고시엔은 일본의 47개현을 대표하는 학교들이 나와 경기를 펼치는 곳인데 한국의 휘문고등학교가 고시엔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치가 맞지 않을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을 빛낸 하늘색의 빛은 고시엔에 분명 닿았었습니다. 오늘은 오래 전, 고시엔에 닿았던 그들의 하늘색 빛을 따라가보려 합니다.


우리나라의 고시엔 출전은 조금은 아픈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1921년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전국 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 조선 예선'이 열렸습니다. 중등학교대회 첫 조선 예선에는 경성중(서울고), 용산중(용산고), 부산상업(개성고), 인천상업(인천고) 등 4개의 학교가 예선에 참가해 부산상업이 처음으로 전국대회 무대를 밟는 조선 대표가 되었습니다.(고시엔 구장은 1924년에 완공되었기에 당시에는 효고현 나루오 구장에서 진행) 하지만, 이 4개 학교의 선수들은 모두 일본인 선수들이었습니다. 이후 치러진 1922년 대회에서는 경성중이 전국대회로 향하게 되었지만 경성중의 선수들 또한 모두 일본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사실상 '조선대표'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팀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교육기관은 고등보통학교(고보)와 중학교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고보는 조선인 학생이, 중학은 일본인 학생이 다녔습니다. 대회 명에서 볼 수 있듯이 '전국 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 '중학'만이 예선에 참여할 수 있었던 대회, 그렇기에 고보를 다니는 조선인들에게는 예선에 나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23년, 한 고보가 최초로 예선을 돌파했습니다. 바로 휘문고보(휘문고)였습니다.

1923년의 휘문고보 야구부 c.뉴스톱

당시 휘문고보는 중등학교 팀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강팀이었습니다. 조선예선 참가에 앞서 휘문고보는 '전조선야구대회'의 학생부 우승팀이었고 전국대회 주최사인 아사히 신문도 이러한 휘문을 특별하게 보았고 문화통치가 이루어지던 1920년대 였기에 조선과 일본간의 화합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휘문고보는 예선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1923년 조선 예선, 휘문고보는 인천상업, 용산중, 그리고 전 대회 우승팀인 경성중을 차례로 격파하며 가볍게 전국대회로 향했습니다. 특히 결승전에서는 전원 일본인으로 이루어진 경성중을 6회까지 8-0으로 끌고가며 압도적인 경기력을 과시해 10-1로 승리를 거둬 진정한 조선대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선 예선을 우승한 휘문고보 야구부 c.뉴스톱

휘문이 전국대회로 향했던 1923년, 전국대회 무대를 밟은 것은 총 19개 학교였습니다. 이 중 휘문을 포함해 만주와 대만 등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의 학교들도 고시엔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학교들 중에서 선수들이 모두 식민지 출신으로 구성된 것은 휘문이 유일했습니다.


휘문은 8월 17일, 만주의 다롄상업과 첫 경기를 치렀습니다. 2회에 2점을 실점한 휘문이었지만 곧바로 4점을 내 역전에 성공, 그리고 9-4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휘문은 3루측 덕아웃을 사용했습니다. 덕아웃 뒤에서는 간사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 동포들이 진을 치고 우리말로 뜨거운 응원을 보냈다고 합니다.

첫 경기를 승리한 휘문 c.뉴스톱


다음 날인 8월 18일, 휘문은 8강에서 교토의 리츠메이칸 중학(리츠메이칸 고교)와 경기를 치렀습니다. 휘문은 7회가지 4-4로 팽팽한 경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9회, 아쉽게도 3점을 내주며 최종 스코어는 7-4, 휘문은 그렇게 짧은 전국대회를 마무리했습니다. 분명 이러한 실력의 휘문이라면 다음 대회에서도 전국무대를 밟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휘문에게 다음은 없었습니다. 휘문은 경성 내 다른 학교들과 학사 비리에 대한 반발로 동맹휴학을 하며 야구부 또한 자연스럽게 중지되었고 이후로 휘문은 대회 예선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도 많은 조선 학교들이 조선 예선에 참가했으나, 참가 선수 전원이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것은 조선 예선이 끝날 때까지 1923년의 휘문이 유일했습니다. 전국 무대로 향했던 하늘색의 빛은 지금까지도 한국 야구를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진정한 '조선대표'였던 휘문고보, 어쩌면 진정한 '한국'의 고교야구는 그것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칩니다. 최민규 기자님의 <고시엔과 조선야구 역사> 시리즈를 참고하여 글을 작성하였으며 우리나라의 야구의 축이 된 휘문고보를 더 많은 분들께서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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