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라 불린 한 소년의 이야기.
‘레이와의 괴물‘. 한 소년이 불린 이름이었습니다. ‘헤이세이의 괴물‘, 마츠자카 다이스케를 이어 한 시대를 대표할 것이라 보였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사키 로키. 오타니 쇼헤이의 고교생 최고 구속 160km/h를 뛰어넘는 163km/h를 기록하며 세간을 놀라게 했고 마지막 여름, 지역 예선 결승까지 팀을 이끄는 에이스로 활약하며 u-18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활약한 한 시대의 괴물은 프로와 메이저의 주목을 받으며 프로의 세계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입성한 프로에서 일본 프로야구 최연소 퍼펙트게임, 17이닝 연속 퍼펙트, 13 타자 연속 탈삼진 등의 기록을 세운 사사키는 2024년 겨울,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많은 팀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많은 관심 속에서 ‘제2의 악의 제국‘, 다저스로 향했습니다. 최근에는 시범경기에 첫 등판해 최고 구속 160km/h, 3이닝 무실점 5 탈삼진을 기록하며 ’레이와의 괴물‘의 미국에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시즌 전, sns를 통해 결혼 소식을 알리기도 하며 정말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진 것 같은, ‘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사키의 등 뒤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고시엔으로 향하던 레이와의 괴물, 사사키 로키의 이야기입니다.
사사키 로키는 2001년 11월, 도호쿠의 이와테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캐치볼을 하며 야구의 꿈을 키운 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어린이 야구단에 들어가 재능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사사키 코타 씨는 야구 미경험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사키 로키의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반드시 프로가 될 수 있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시작한 야구, 형과 야구를 함께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와중 그와 그의 가족을 덮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11년, 일본 도호쿠를 덮친 동일본 대지진, 이와테현도 그 피해를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사사키 로키의 아버지와 조부는 쓰나미로 인한 수난사고로 사망했고, 그와 형제들과 어머니는 오후나토시로 이주해 가건물에서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실종된 지 5일째가 되던 날, 가족에 걸려온 아버지의 시체를 찾았다는 전화에 어린 사사키 로키는 아버지가 무사하다는 걸로 이해하고 기뻐했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곧 상황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고향에서 오후나토시로 이사를 간 사사키 로키는 이후에도 야구를 계속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지역에서 사사키 로키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어려웠을 정도로 사사키 로키의 실력은 이미 완성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중학교에서 이미 140km/h를 넘긴 구속으로 팀을 도호쿠 지역 대회 우승, 전국대회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이는 전국 명문고교들의 스카우트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야구 명문고교 중 사사키를 가장 탐냈던 것은 명문 중의 명문이자 일본 유일의 봄-여름 연패 2회 기록의 오사카 토인이었습니다. 토인은 여러 차례 오후나토 제일중에 시찰을 와 사사키 로키에게 입학 권유를 했지만 사사키는 몇 번이고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후나토 제일중에서 1학년때부터 야구를 함께한 친구들과 고시엔을 노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사키 로키는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프로를 지망한다면 오사카 토인에 진학하는 것이 드래프트에서 지명될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함께 야구를 하던 친구들과 고시엔을 노리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최근에는 고시엔 명문 팀들의 전국구 단위 스카우트가 많아져 한 지역에서만 성장한 선수들로 고시엔에 나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특히 선수들도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고 야구를 할 수 있는 더 좋은 환경으로 향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사키 로키만은 달랐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고시엔을 노리겠다는 일념이 소년의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오후나토 고교에 진학한 이후 사사키는 곧바로 대회 명단에 들었습니다. 1학년 데뷔전에서부터 최고 구속 147km/h를 기록하며 많은 야구팬들을 놀라게 한 그였습니다. 그리고 2학년 봄, 최고 구속 153km/h를 기록하며 다시 한번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사사키 로키는 이에 멈추지 않고 여름에는 154km/h 가을에는 무려 157km/h를 기록하며 이미 많은 프로 구단들에 눈도장을 찍었습니다. 이제 많은 이들의 관심사는 그가 오타니 쇼헤이의 고교 시절 최고 구속 160km/h를 경신할 수 있을 것인가였습니다.
오후나토 고교는 1984년 단 한 번 고시엔에 출전한 이후 단 한 번도 고시엔에 가보지 못한 학교였습니다. 그런 오후나토 고교는 사사키가 합류함으로써 단숨에 고시엔을 눈앞에 둔 학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사사키는 단순히 실력으로만 팀을 이끈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사사키는 프로에 가는 것보다 이 멤버들로 고시엔에 가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며 수많은 명문고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오후나토고교로 온 자신 때문에 부담을 받을 수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고 매일 밤늦게까지 훈련을 하며 솔선수범을 보였다고 합니다. 특히 팀메이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4번 타자로서 타격에 대한 조언을 하거나 투수로 등판하지 않을 때는 외야에서 투수를 응원하며 이닝 종료 이후 외야에서 본 본인의 생각을 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더 이상 같은 차원에 있는 동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과 리더십을 갖춘 진정한 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괴물의 손에 고시엔은 쉽게 닿지 않았습니다. 1학년 여름과 2학년의 여름 모두 3차전에서 탈락하며 그에게 남은 기회는 단 한 번, 3학년의 마지막 여름이었습니다. 여름 이전, 4월에 있었던 청소년 대표팀 집합에서 최고 구속 163km/h를 기록한 그는 마지막 고시엔으로 향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마지막 여름, 사사키는 2차전에 선발등판해 2이닝을 퍼펙트로 막고 마운드를 내려왔고 팀은 콜드승으로 3차전으로 향했습니다. 3차전에서도 사사키는 선발등판해 6이닝을 93구 무피안타 1 사사구 13 탈삼진으로 완벽하게 막아냈습니다. 최고 구속은 155km/h. 3일 후 치러진 4차전에서도 사사키는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사사키는 홀로 연장 12이닝을 던지며 194구 7피안타 3 사사구 21 탈삼진을 기록하고 결승 투런을 때려내며 팀을 준준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사키의 194구 투혼은 많은 야구 관계자들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걱정을 쏟아내게 했습니다. 완급 조절을 했다지만 계속해서 150을 넘겼던 구속과 194 구라는 한계치에 달하는 투구 수, 어쩌면 괴물을 더 이상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준준결승에서 사사키는 등판하지 않고 팀은 투수들의 연계로 연장 승부 끝에 준결승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준결승에서 다시 선발로 등판한 사사키는 9이닝 무실점 2피 안타 3 사사구 15 탈삼진으로 상대를 압도하며 마지막 여름, 고시엔에 단 한 발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괴물의 완벽투 뒤에는 리스크가 있었습니다. 사흘 연속으로 경기가 치러진 4차전, 준준결승, 준결승. 하루를 쉬긴 했지만 3일간 323구는 고교생에게 너무 많은 투구 수였고 사사키는 준결승 경기 전 팔꿈치에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준결승을 완투한 그였기에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경기 종료 이후 그는 내일 있을 경기에서 고시엔으로 향하는 피칭을 하고 싶다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 준결승 완봉이 사사키의 고교야구에서의 마지막 투구였습니다.
하나마키 히가시와의 결승전, 팀은 12-2로 패하며 고시엔을 놓쳤습니다. 이에 대해 쿠보 감독은 "던질 수는 있는 상태였을지도 모르지만 더 큰 부상을 막기 위해 사사키를 내지 않았다"라고 밝혔고 이에 대해 사사키도 감독의 의견에 따라 등판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렇게 괴물의 여름은 막을 내렸습니다.
고교야구 생활이 끝난 이후 사사키는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어 한일전에 등판하는 등 활약했고 치바 롯데에 1순위로 입단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2023년 WBC 대표팀에도 발탁된 그는 2023년 3월 11일, 도쿄돔에서 열린 체코와의 예선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4이닝을 8 탈삼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습니다. 다만 그는 이러한 활약에도 웃지 못했습니다. 소년이 마운드에 선 그날은 어릴 적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었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년의 164km/h 강속구는 단순히 야구를 넘어 재난으로 쓰러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일어날 힘을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2024년 겨울, 다저스에 입단하게 된 그는 2011년, 3월 11일을 기억하며 등번호 11번을 달았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곳을 그리고 사람들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다저스와 컵스의 도쿄 시리즈가 시작됩니다. 11번을 단 이와테 출신의 어린 소년이 늠름한 청년이 되어 도쿄돔의 마운드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힘을 주었으면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