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의지를 담은 한 주먹
작년 여름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를 받으러 갈 때 와세다(서도쿄)와 코난(오키나와)의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간사이 공항에서 숙소인 아마가사키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천천히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계속해서 경기 중계를 봤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짐을 놓고 바로 나와 전철을 타고 향한 고시엔. 날이 정말 뜨거웠고 푸른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짙은 녹색의 잔디와 태양빛을 머금은 듯한 검은흙, 그리고 넓게 울려 퍼졌던 브라스밴드의 응원까지. 제 2024년의 고시엔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츠루오카히가시와 세이코학원의 경기, 7회 초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 앉았던 자리는 1루 내야 하단석이었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불펜 앞에서 몸을 푸는 투수들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바랐는데 아쉽게도 그 장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에 더그아웃이 있었기에 선수들과 감독의 대화가 들리기도 했고 선수들의 표정이 더욱 자세하게 보였습니다. 세이코 학원의 마지막 공격이병살로 끝났을 때 1루 응원석의 탄식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습니다. 경기 종료 후 홈 베이스 앞에 도열한 선수들은 인사를 마친 후 더그아웃 앞에 서서 승리한 학교의 교가를 들었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이 부분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더군요. 승리한 학교의 교가 제창이 끝난 후 선수들은 응원석에 가서 인사를 했습니다. 이후 더그아웃에 돌아와서 더그아웃 앞의 흙을 글러브 주머니나 스파이크 주머니에 담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해서 자신이 뛰었던 혹은 밟고 싶었던 꿈의 무대를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프로야구장으로 넓혀보아도 각지의 흙을 블렌딩 하여 사용하는 야구장은, 그리고 내야 전체가 흙으로 뒤덮인 것은 고시엔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시엔의 이 검은흙은 고시엔을 상징하며 많은 고교야구 선수들은 이 흙을 밟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오늘은 이 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고시엔에 나오기 위해서는 각각의 지역에서 열리는 예선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최소 5,6연승을 해야만 밟을 수 있는 꿈의 성지, 고시엔. 고시엔 출장을 전국단위로 환산해 보면 약 1.32%의 승자들만이 고시엔을 밟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적적으로 진출한 고시엔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갈립니다. 승리한 소년들은 야구를 계속하고 패한 팀의 3학년들은 그 순간 여름이, 자신들의 야구가 끝납니다. 이는 고시엔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습니다. 고시엔에 나온 3학년들은 자신들의 청춘을, 자신들이 사랑한 고교야구의 마지막 기억으로 고시엔의 흙을 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처음부터 있던 것은 아닙니다.
고시엔의 흙을 처음으로 가져간 선수의 기록은 1937년 여름 제23회 대회, 구마모토 공고의 투수였던 카와카미 테츠지였습니다. 당시 결승에서 패해 준우승으로 여름을 마무리했던 카와카미는 경기 종료 이후 고시엔의 흙을 유니폼 주머니에 넣고 자교의 연습장에 뿌렸다고 합니다. 이게 고시엔의 흙에 관련된 첫 번째 기록입니다.
두 번째는 가장 유명한 일화인 1946년의 제28회 대회입니다. 준결승에서 패한 도쿄 고등사범부속중 야구부의 사사키 토시오 감독이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 선수들에게 "자신이 뛰었던 포지션의 흙을 가져와라. 내년에 꼭 다시 돌려주러 오자."라고 했던 것이 지금의 고시엔의 흙을 가져가는 것의 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1946년 대회 당시에는 종전 1년 후였기에 고시엔이 연합국군에 압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져간 것은 고시엔의 흙은 아니었습니다. 이는 공식적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고시엔의 흙에 관한 기록입니다.
마지막은 1949년 제31회 대회, 준준결승에서 패한 고쿠라기타의 에이스이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후쿠시마 카즈오의 이야기입니다. 여름 3연패에 도전한 고쿠라기타였지만 이 대회 준준결승에서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경기 종료 이후 후쿠시마는 홈 베이스 뒤에서 무의식적으로 발밑의 흙을 한 움큼 집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고 합니다. 3학년으로서 마지막으로 밟은 고시엔이었기에 고교 선수로서 고시엔에 올 일이 없다는 생각에 쓸쓸해 무의식적으로 흙을 담았었다고 하는 그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러한 이야기들이 지속되어 언젠가부터는 경기 종료 이후 각자 뛰었던 포지션에서 흙을 가져오고, 그것이 지금의 벤치 앞의 흙을 가져가는 형태가 된 것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고시엔의 흙의 의미는 3학년들에게는 고교야구를 기억하는 마지막 추억이고 1, 2학년들에게는 다시 한번 고시엔에 돌아오겠다는 의지인 것입니다.
이전에 제가 포스팅했었던 '오키나와의 꿈, 섬마을 사람들의 비원'의 이야기입니다.
1958년, 오키나와 대표로서 고시엔에 참가했던 오키나와 슈리고교는 1차전에서 패배했습니다. 앞의 이야기들에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나 고시엔의 흙을 가져가는 것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을 때, 슈리고교의 선수들은 경기 종료 이후 다른 학교들과 같게 고교야구의 추억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으로 고시엔의 흙을 챙겨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추억과 다짐은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오키나와는 종전 이후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고시엔의 흙은 미국의 검역방침을 통과하지 못했고 결국 선수들은 니하 항에서 흙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항공의 승무원들이 고시엔 구장 주변의 해변에서 자갈을 주워 슈리고교에 기증해 '우애의 비'라는 것이 생겼다고 합니다.
아마 오키나와의 소년들은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기 전이었던 1972년까지 고시엔의 흙을 들고 가지 못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키나와는 이후로 고시엔 우승과는 연이 멀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동경하고 바라는 고시엔이지만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을 것 같습니다.
섬마을 사람들의 비원은 이로부터 약 50년이 지난 2010년, 오키나와 코난의 봄-여름 연패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승 당시 캐스터도 "반 세기 전, 고시엔의 검은흙조차 가져가지 못했던 류큐의 섬에, 처음으로 진홍의 우승기가 전해집니다! 오키나와의 꿈, 섬마을 사람들의 비원을, 코난 고교! 봄-여름 연패의 위업으로 달성해 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이렇듯 고시엔의 흙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안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억과 다짐을 담은 고시엔의 흙이지만 이러한 흙을 가져가지 않는 이들 또한 존재합니다. 우선 이렇게 고시엔의 흙을 가져가는 것은 대부분 여름 대회이며 센바츠에서 흙을 가져가는 것은 굉장히 드뭅니다. 여름 대회에서도 내년과 내후년이 남아있는 선수들이 "다시 온다"라는 강한 의지로 고시엔의 흙을 가져가지 않는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혹은 프로가 되어 고시엔에 돌아오겠다는 의미로 흙을 가져가지 않은 이들도 있었고 자신의 고교야구가 끝난 아픔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흙을 가져가지 않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고시엔의 흙은 '기억'과 '다짐', 그리고 '청춘'으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 내가 고교야구를 했었다는, 고시엔까지 올라왔다는 기억.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다짐' 그리고 이곳에 오기 위해 흘렸던 땀들이 담긴 '청춘'이 고시엔의 흙을 설명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소년들이 고시엔의 흙을 가져갔으면 합니다. '촉각'은 기억에 있어 시각과 시너지르 내며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합니다. 1%의 가능성을 뚫고 고시엔을 밟았었던 자신들의 청춘을, 고시엔의 흙으로 기억했으면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다소 가벼운 글이었지만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