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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반짝 빛나는 Nov 05. 2021

주방 조(俎) 부인 수난사

사물의 시점에서 바라본 '나'



우리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볼 때 미소로 바라봐 준 적이 거의 없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그녀가 막 30대가 되었을 때였다.

그날은 그녀가 처음 나를 구매한 날이다.

(물론 그전에 그녀를 어렴풋이 본 기억이 있지만, 너무 뜨문뜨문 있었던 일이라 이때를 그녀와의 첫 만남으로 기억하고 싶다)


나를 고를 때 그녀 손끝에서 설렘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를 처음 구매해 본 것인지 무표정한 모습으로 잠깐 고민하다 큰 사이즈와 중간 사이즈 하나씩 고르고 나의 단짝 친구도 골랐다.

그 후 며칠이 흘렀을까? 그녀의 새집에서 우린 만났다.

그녀는 하루 세번 나를 만날 때면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찡그리며 바라보곤한다.





일단 그녀는 기본적으로 나의 짝을 다루는 법을 모른다.

그녀는 나의 짝을 아주 ‘무식’하게 다루었다.

어느 정도 재료는 그렇다 해도 무, 수박, 둥근 호박 등을 만날 때면 그녀는 어김없이 “여~보”를 부른다.

그런 여보가 없는 날이면 내 위에 재료들을 올려놓고 아주 그냥 사정없이 두드린다.


내 짝은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어느 날 그녀의 짝이 내 짝의 표정을 본 것인지, 우리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은 것인지 고맙게도 먼저 이야길 건넨다.


“여보, 칼이 잘 안 드는 것 같은데,
내가 갈아줄까요?
아님 칼 가는 곳에 다녀올까요?”



내 맘속이 뻥 뚫리는 이야기를 우리 대신해줘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에요, 무서워서요.
어릴 적 식칼로 밤을 자르다
 손가락을 베인적이 있어요.
 칼을 날카롭게 갈면 겁이 나서 못 쓸 것 같아요.”


라고 대답하지 않는가,

무딘 칼날이 더 위험한 법인데 그녀의 아픔은 유감이나 우리의 앞날이 막막했다.


자고로 나의 존재는, 내 짝을 만났을 때 경쾌한 울림과 속도감 있는 장단의 흥으로 내 본분을 다하는 기분을 만끽하곤 한다. 


무딘 칼날은 내 몸에 상처만 낼뿐 경쾌하지 않고 툭툭 둔탁하게 떨어지는 칼날 소리는 하루 세 번 일할 맛이 당최 나지 않는다.

또한 그 덕에 내 몸의 상처뿐 아니라 내 마음의 자존심도 스크래치 난다.

좀 가지런히 내 몸 위에 식재료를 고이 썰어주면 좋으련만,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칼솜씨로 어떤 날은 내 몸 위에 앉아 있는 재료보다 날아간 재료가 더 많을 지경이니 도마의 ‘태’가 말이 아니다.


난 이 집의 도마로 명명되어 온 날부터 주인을 잘못 배정받은 거라 마음을 비우며 살고자 다짐했다.



몇 년 후, 그녀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녀는 자기가 열심히 낸 내 몸의 상처를 유심히 보더니 새 도마를 한참 검색했다. 아이의 이유식을 하려니 내 모습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나 보다.



참, 내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미리 안 하였구나,
나는 분신술이 있어 이 집의 도마로 명명된 후,
이 집의 모든 도마는 바로 ‘나’다.
 
그런즉, 내가 버려지고 새로운 도마를 구매하더라도
그것 또한 ‘나’이다.


하여튼 그녀는 천연나무로 만든 도마, 열탕 소독이 가능한 실리콘도마를 한참 검색하더니 관리가 어려워 보였는지 나무도마는 포기, 실리콘 도마도 단점을 찾더니 또 포기했다.

그래, 나무 도마를 안 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리콘 도마를 안 사는 것은 참 잘한 일이다.

바닥과 밀착되어 붙어있는 실리콘을 도마라 부르기엔 도마 가문의 ‘수치’다.(도마의 매우 주관적인 시선임!)


며칠 후 그렇게 고민을 하던 그녀 걱정이 한순간 날아갔다.

이유식 시기에 맞춰 색깔 인덱스 도마를 선물 받은 것이다.

빨강 도마는 육류, 초록 도마는 채소, 파란 도마는 생선, 하얀 도마는 가공식품에 사용하는 도마다.


하지만 그녀의 요리는, 무조건 초록 도마다.

그녀의 무관심으로 인해 세 개 도마는 새 것과 같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여전한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나의 아픈 손가락 초록 도마는 온몸에 생채기를 한 몸에 받으며 장렬히 전사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나무 도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 긍정적인 생각이로다.

자연이 준 선물 피톤치드 향기가 그윽한 편백도마, 진갈색의 멋스러운 월넛 도마의 자연 그대로 내 모습은 세상 그리 멋질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천연의 아름다운 내 자태가 그리워 구매를 응원했다.


‘그래, 나무도마로 다시 태어나자.

식물성 오일로 관리 해 준다면 나의 몸에 생긴 생채기도 자연 치유된다.

아픈 손가락인 초록 도마를 떠나보냈지만

나의 자부심을 느낄 그윽한 향기와 고운 빛깔 무늬 나무 도마로 나는 다시 태어나리라!’


그러나 막상 집에 도착한 내 모습은 여태껏 그녀가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찜해뒀던 고급 나무도마가 아니라 조잡하게 가공된 인도네시아 산 아주 저렴한 나무도마였다.


믿을 수 없었다.

오배송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자신 있게 포장을 뜯는다.

이럴 수가! 나는 나무도마의 자존심을 잃어버렸다.

처음엔 나를 애지중지 사용하더니 어느 날부터 제대로 나를 관리하지 못해 한쪽 모서리에 곰팡이가 거뭇거뭇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그녀는 뒤늦게 발견하고는 아주 강력한 수세미로 박박 문지르더니 가차 없이 나를 쓰레기봉투에 넣어버렸다.

 

찰나 같던 나의 인도네시아 산 도마는 그렇게 안녕이었다. 



그 후 그녀는 편백 나무 도마를 드디어 샀다.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 향기 가득한 내 자태가 싱크대에 올라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건만 쉽사리 내 몸은 그곳을 향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나는 지끈 리본을 감고 장식장에 있어야 하는지 묻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짝이 대신 물어본다.



“여보, 이건 용도가 뭐예요? 장식용이예요?”



 “아, 그거, 조리용 도마인데
나무 도마 썼을 때 생각보다 관리가 참 힘들더라고요.
다시 잘 사용할 용기가 안나 저렇게 보고만 있어요.
 향기도 좋고 기분도 좋아서, 그냥요.”


그녀의 짝은 살짝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나에게 관심이 사라지던 어느 날, 나는 그녀 집을 떠나 그녀의 친정 싱크대로 안착했다.

그녀는 친정엄마에게 콧소리 높여가며 나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다.

나는 딱 이 장면까지만 기억이 난다.


 “엄마, 이거 진짜 비싸고 좋은 도마예요.
 그러니까 기름도 잘 발라주고 그늘에 잘 세워 말려주고,
관리 정말 잘해줘야 해요. 알겠죠?
내가 진짜 확인하러 올 거예요.
곰팡이 피면 진짜 안돼요 알겠죠?”



라며 있는 생색 없는 생색을 다 내고는 그녀는 떠났다.

자기가 쓸 용기는 안 나서 엄마를 드린 것 같더니, 이번엔 훨씬 더 비싼 진갈색의 월넛 도마를 구매했다.

이런! 자기 더 좋은 도마를 사려고 친정엄마에게 그리도 생색내며 드렸나 보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 갔다. 

그녀는 친정엄마에게 도마를 사드리고 나니 시어머니의 낡은 도마가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도마를 눈으로 한참 보고 또 보더니 며칠 후 시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 도마가 예뻐서 샀어요.
사용설명서 꼭 확인해 보시고 사용하세요.”



라며 짧고 굵게 말씀을 드린다.

시어머니께 드린 도마의 가격을 생각하면 친정 엄마한테 한 당부의 두 배쯤은 더 했어야 직성이 풀릴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도마야, 행복해야 해’ 라며 간절한 염원을 담은 당부의 눈빛을 보내며 말없이 사용 설명서만 두 손에 꼭 쥐어드리고 돌아왔다.                                                                                                    




그렇게 그녀의 나무도마 구매는 끝이 났다.

아마 예쁘고 고급스러운 비싼 나무도마는 아직 그녀의 그릇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자신의 분수를 알기에 더 짠하고 기특한 그녀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괜찮아 보인다.

 

비록 초록 도마는 장렬히 전사했지만,

그녀에겐 아직 3개의 내가(도마) 남아있기에!




왼:4색 인덱스도마(나의것)     중:편백도마(친정엄마)    오:월넛도마(시어머님)-출처:조셉조셉인덱스도마, 한옥인테리어 나무도마



*제목 참조: 조(俎)-도마'조'



-신현정 강사님 글쓰기 수업 중 (사물이 되어 글쓰기 :의인화)- 정말 재미있게 쓴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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