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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중담 Apr 03. 2024

사찰을 찾아서

성주사지, 무량사, 대조사, 관촉사

< 여행 다섯째 날 >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것에도 수준이 있다는데, 고수는 옛 사찰의 흔적만 남아있는 폐사지를 찾아간단다. 성주사는 통일신라 하대 선종의 9가지 갈래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성주산문의 중심 사찰이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이곳에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고민을 했다. 왜냐하면 대천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면 동선의 낭비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왕 답사하는 거 고수 흉내라도 내볼 심산으로 성주사지를 찾았다.


뜨거운 여름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쬔다. 그늘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그럴듯한 건축물 하나 없지만, 열정 하나 가지고 가람배치며 기단이며, 석탑, 탑비, 민불까지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낭혜화상탑비의 비문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12세에 출가하여 82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선종을 습득하고 20여 년 동안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그를 지칭하여 ‘동방대보살’이라 일컬었다.”


나는 비록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숭고한 삶을 사신 분들을 대할 때면 변함없이 동일한 감동을 받곤 한다. 이런 분들에게 종교적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할 능력과 자격이 내겐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같은 사람으로서 그의 삶에 감동을 받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성주사지 전경(前景). 폐사지는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 과거 절터의 흔적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낭혜화상탑비는 통일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글을 짓고, 최인연이 해서체로 썼다. 이 글을 통해 선종의 역사와 당대의 신분제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탑비는 최치원의 명문장과 뛰어난 조각술, 훌륭한 보존상태와 웅장한 크기 등이 어우러져, 통일신라말기 고승 탑비 중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성주사지를 떠나 무량사로 향했다. 지금이야 사찰 입장료가 없지만, 여행할 당시에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카드 결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할 수없이 일주문 밖 식당에서 밥을 먹고 현금을 마련해 들어갔다. 마침 출출하기도 해서 식당을 찾았는데, ‘올방개묵’이라는 처음 보는 음식이 있었다.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가 바로 색다른 음식을 먹어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망설이 없이 바로 시켜 먹었다. 맛이 어떠냐고 묻지 말기 바란다. 나는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출연자들처럼 맛깔나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니 직접 드셔보시길...


무량사는 부여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진에 보이는 극락전과 5층석탑, 석등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사에 들어서자마자 보물 세 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극락전과 석탑, 그리고 석등. 무량사 극락전은 2층 팔작지붕을 올린 멋있는 건물이었다. 사방에 활주를 둘렀고, 2층 지붕에도 활주를 세웠다. 안쪽은 하나로 뚫려있어 높이 솟은 천장과 무늬가 멋이 있다. 5층석탑은 기단이 하나, 몸돌과 지붕돌이 5개인 5층 석탑이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고 있고, 처마 부분이 위로 솟구쳐 있는데, 이것을 보면 백제 양식으로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양식과 백제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이라고 한다. 


1층과 2층이 하나로 뚫려 통을 이루고 있는 극락전의 천장 무늬. 현장에서 직접 올려다보면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멋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김시습의 자취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방랑을 하다가 스님이 되어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적이 있는데, 그가 머물렀던 곳이 무량사인 줄 처음으로 알았다. 그의 법명은 ‘설잠’이었다.





가까운 곳에 문화유산 답사의 대부 유홍준 교수의 별채가 있어 찾았다. 주말에만 내려오신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역시 오늘은 안 계셨다. ‘휴휴당(休休堂)’ 마루에 인사말과 함께 메모를 남겨놓고 길을 떠났다. 


장하리 3층석탑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아쉽기는 하지만 늘씬한 몸매의 탑신과 얇고 평평하니 하늘로 솟구치듯 처마 끝이 올라간 모습은 여전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대조사와 관촉사의 미륵상은 정말 괴상하게 생겼다. 몸의 비례가 맞지 않고, 얼굴도 기묘하게 생긴 데다, 머리 위에 네모나고 기다랗게 올라앉은 관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괴이하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민중들을 불교로 끌어들이는 계기를 마련한,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불상 양식으로 의미가 있어 카메라에 고이 담아왔다.


위쪽이 관촉사 은진미륵상, 아래쪽이 대조사의 석조미륵보살상이다. 이들 미륵상은 당시 충남 지방에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석굴암 불상의 ‘조화’와 이상미, 완벽한 ‘질서’는 중앙정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된 불교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대조사의 석조관음보살상과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같은 괴이하고 파격적인 모습은 질서를 파괴하는 힘과 조화를 이루어, 중앙정치 체제에서 벗어나 지방 중심으로 힘이 기울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내일 답사가 시작되는 익산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으러 찾은 ‘김여사 맛집’은 6천 원 가격에 맛있는 반찬과 수박까지 간식으로 준다. 익산의 인심 김 여사님, 감사합니다~



⁕ 월, 목 - <문장의 힘!>

⁕ 화, 금 - <삶, 사유, 사람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 수, 일 - <딴짓도 좀 해보지?>


일요일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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