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문제를 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정답을 열어보게 됩니다. 과정의 지난함을 견디지 못하고 답지에 먼저 눈이 갑니다. 정답을 열어보기 시작하면 자기만의 풀이 과정에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이렇다 보니 정답지의 풀이 과정도 외우게 됩니다. 풀이 과정을 외우는 공부를 하니 각도가 조금만 벗어나면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문제집에는 풀이 과정과 정답이 있지만 인생에는 풀이 과정도 정답도 없습니다. 위인들의 삶이 풀이 과정이고 정답일 수 있다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일반적으로 귀납적 지식입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하여 일반적인 원리와 법칙에 도달합니다. 소크레테스는 죽었다. 세종대왕도 죽었다. 우리 조상님도 죽었다. 나도 죽는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특수 사례를 모아 일반적인 법칙에 이릅니다. 이런 귀납적인 사례는 반례가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귀납법은 이런 한계를 지닙니다. 위인들의 삶은 특수한 개별적 상황입니다. 위인들의 사례가 많아진다고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개인의 역량이 다르기에 그렇습니다.
위인들의 방식을 나의 인생에 대입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가능하다고 해도 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내 그릇은 대접인데 큰 항아리의 물을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항아리의 능력을 배우는 것이 부질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아리의 능력을 배운다고 내가 항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크기가 있습니다. 타고난 크기를 넘어설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위인의 삶을 따라 한다고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책할 일은 아닙니다. 삶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관순 열사, 안중근 의사 같은 분만이 독립을 위해 필요한 분은 아닐 것입니다. 죽음은 두렵지만 독립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했던 사람들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누가 더 위대한 삶이냐라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신 분의 위대함도 존경스럽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아 독립운동이 전개되도록 일을 도모한 분들도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항아리도 필요하고, 대접도 필요하지만 간장을 담는 종지그릇도 필요합니다. 크다고 가치가 더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의 삶을 배우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이 삶이지 내 삶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수만큼 삶의 해법이 존재할 것입니다. 비슷해지려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과 완전히 겹쳐지는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삶의 정답을 찾아보지만 원래부터 나에게 맞는 정답은 없습니다. 내 삶의 과정 자체가 풀이 과정이고 내 삶의 답일 것입니다. 나의 답이 정답인지는 누구도 판단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정답의 범주에 드는지는 알 수 있을 줄 모르겠습니다. 정답의 범주에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려는 노력, 그것이 우리가 찾으려는 우리 인생의 정답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 삶의 풀이 과정이 정답의 범주에 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