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미사는 처음이다. 미사는 여느 때와 같이 진행됐다. 다른 모습은 관가 유족이다. 관 안에는 사람이 누워 있고 그분은 눈을 감은채 두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을 것이다.
처음 죽은 사람을 본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다. 어린 나이에 우연히 할머니의 염을 봤다. 염은 고인의 시신을 정리하고 수의를 입히는 과정이다. 몸을 닦고, 손톱과 발톱을 깎았다. 입에다 쌀을 넣고 입, 코, 귀 등을 막았다. 수의를 입히고 얼굴과 손발을 묶었다. 마지막으로 시신을 관에 옮겼다.
어릴 적에 봤던 기억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는 모습이다. 그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막연한 생각에 슬펐던 기억이 난다.
성당에서 노래를 부르며 관 안의 고인과 내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봤다. 고인은 오감이 없기에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오감으로 세상을 읽어낼 수 없다. 고통도 기쁨도 없다. 불안감과 행복감도 없다. 그럼 고인은 무(無)인가? 나는 있고 고인은 없는 것인가?
나는 살아 있고, 고인은 죽었다. 삶은 있는 것이고, 죽음은 없는 것인가?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양면성은 다른 한쪽을 있게 하는 힘이다. 한쪽이 없으면 반대쪽도 없다. 양면성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다. 양면성은 양극단에 있는 것도 아니다. 끝에서 끝까지의 어디에서든 양극단은 존재한다. 어디에 얼만큼씩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지점이든 양쪽이 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한쪽으로의 모습만으로 존재해야 한다. 한쪽으로만 존재한다면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 섞여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만 있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고 영원히 멈춰 있는 것은 없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시간으로만 가늠하기에 잠시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을 떠난 시간으로 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한다.
삶이 죽음으로 변하는 것은 볼 수 있기에 부정하지 않는다. 죽음이 삶이 되는 것은 보지 못하기에 믿지 않는다. 삶이 죽음으로 가는데 죽음이 삶으로 오지 않으면 그 삶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삶이 죽음으로 향하고, 삶에 죽음이 함께 있다면, 죽음은 삶으로 향하고 죽음에는 삶이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삶과 죽음이 한 자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삶과 죽음만이 그럴까? 고통, 우울, 절망, 허무 같은 감정도 행복으로 향하고 행복을 담고 있지 않을까? 행복은 고통, 우울, 절망, 허무 같은 것을 향하고 그것들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삶이 100년이라고 할 때 우리의 죽음은 얼마나 될까? 시간이 인위적이긴 해도 가늠하기에는 도움이 되는 구석이 많다. 죽음이 하늘에 있건, 죽음이 다시 우리 삶으로 오든, 죽음에서 삶의 과정은 오감으로는 알 수 없는 시・공간에 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無라고 할 수 없다. 無라고 단정 짓는 순간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세상이나 말이다.
이곳이 아닌 저곳의 삶에서도 의미 있는 삶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