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을 산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나를 살았다.” 로맹가리의 말이다. 로맹 가리는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소설가, 외교관, 영화감독, 비행사다. 본명은 로만 카체프로 14세 때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니스로 이주해 성장했다.
오늘은 이 문장이 마음에 머문다. 삶은 나의 주체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그것과 다른 결을 보인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닐 수 있다.
내 안에는 두 개의 존재, 자아와 참나가 있다. 자아는 일상에서 “나”라고 여기는 존재, 즉 생각, 감정, 경험, 사회적 역할, 신체 등과 동일시되는 변화하는 나를 의미한다. 자아는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자신의 경험을 분별하고 해석하는 주체다.
참나는 변화하지 않는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나다. 모든 경험에서 변함없이 존재하는 순수 의식, 본래 자기, 영원한 자아를 뜻한다. 참나는 시간과 공간,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고, 모든 감정과 생각, 경험의 근원에 있는 ‘진짜 나’로 여겨진다.
우리는 자아가 삶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질곡에 빠지면 자신을 탓한다. 삶은 순탄한 길로도 어려운 길로도 들어선다. 삶이 경유하는 모든 곳을 자신이 운전해서 그곳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불안함과 책망을 마음 한편에 머무르게 한다. 잘 못 들어설까 불안해하고 그곳으로 발길을 돌린 자신을 탓한다.
삶은 자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결과일까? 세상을 감각의 틀로 인식하여 반응하는 자아가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자에 의해 삶이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을 지배하는 자, 모든 경험을 변함없이 지켜보는 자에 의해 삶이 살아지는 것이 아닐까?
참나에 의해 삶의 가능성이 현실화된다면 다르게 봐야 한다. 일상에서 참나를 마주하기는 어렵다. 일상에서 나를 느끼는 것은 감각과 감정을 통해서다. 보이는 모든 것을 포함해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변한다. 변화되는 모든 것은 자아가 움직여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참나의 움직임에 의해서일 수 있다.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참나라면 참나를 인식하고 움직이게 해야 한다. 자아는 표면적인 대리인이지 삶을 움직이게 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참나와 만나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흙탕물이 일 때는 물속이 보이지 않는다. 감각과 감정으로 가득하면 마음 깊은 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곳이 보이지 않으면 참나를 만날 수 없다. 참나를 만나려면 감각과 감정이 크게 움직이면 안 된다. 외부를 인식하는 감각을 줄이고, 감정이 요동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생명활동의 가장 기본만 남기고 감각을 차단한다. 호흡에 집중하고, 오감에서 멀어진다. 세상은 빛으로 보지만, 내 안은 어둠으로 본다. 세상은 형태로 존재하지만, 내 안은 추상으로 존재한다. 보이지 않음을 배경으로 정형화되지 않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
돌을 던지지 않아야 파문이 일어나지 않는다. 파문이 일고, 흙탕물이 올라오면 기다려야 한다. 물결이 잠잠해지고 흙이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집착은 삶에 흔적을 남긴다. 사뿐히 밟고 지나간다고 해서 삶이 방향을 잃고 허공에 흩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보여주려는 삶을 즐기는 것이 최춘해 시인의 시 「소풍」의 구절대로 사는 것이리라.
“인생은 소풍이다. 잠시 왔다가 가는 길이다.”
행복한 가정에 날개 달기(건강, 관계, 돈)연수 오픈 채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