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이는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by 긴기다림

“공부하고 게임해.”
“게임하고 공부할 거야.”

아이 있는 가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화다. 엄마는 ‘공부 먼저, 그다음 게임’을 말하지만, 아이는 ‘게임 먼저, 그다음 공부’를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아이는 게임을 하고 또 게임을 한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엄마는 40~50년을 살았다. 아이는 8년에서 18년 정도 살았다. 약 30년의 경험 차이가 있다. 엄마는 공부와 삶이 연결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장면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이 경험 차이가,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며 엄마를 답답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사람은 공감되지 않는 행동을 하기 어렵다. 공감이 되지 않으면, 아주 큰 이득이 있거나 재미있을 때만 움직인다. 아이에게 공부는 공감도, 재미도, 이득도 되지 않는다. 엄마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그대로 따라 하기 어려운 이유다. 결국 엄마의 경험은 엄마의 것이고, 말만으로는 그 경험을 옮길 수 없다.


엄마는 힘든 산을 넘어와 이제 아이와 평지를 걷고 있다. 엄마는 평지 너머에 또 다른 산이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아이에게 “지금부터 배낭을 메고 준비하라”고 한다. 하지만 아이는 산을 본 적이 없으니, 굳이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아이에게 공부는 산이다. 왜 넘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산이다. 엄마는 산 너머에 좋은 것이 많다고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음은 생기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는 절벽 앞에서 “보이지 않는 다리가 있으니 뛰어내리라”는 대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의 아이에게는 불가능하다. 아이에게 공부는 경험해 보지 못한 다리이고, 오아시스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단지 재미있는 시간을 빼앗아 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이가 공부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까? 어렵지만 가능하다. 재미없는 행동이 자리 잡으려면, 먼저 많이 보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조금씩, 무심코 따라 하게 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친구가 공부하는 모습,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모든 공부를 다 요구하면 안 된다. 언어가 먼저다. 국어가 먼저다.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글을 읽고 쓰며 세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집을 짓기 위해 망치질과 톱질을 배우는 것은 기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말과 글을 통해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 이야기를 만나고, 책을 읽으며 관심 있는 지식과 정보를 쌓는 것이다. 그렇게 작은 지식이 쌓이면 자존감이 자라고, 자존감은 곧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만드는 매력으로 이어진다.


엄마와 아이는 줄다리기를 멈춰야 한다. 둘은 사실 줄다리기가 아니라 ‘2인 3각 경기’를 하고 있다. 엄마가 힘으로 내달리면 아이는 끌려오지만, 결국 경기를 포기한다. 중요한 건 같은 보폭으로, 느리지만 발을 맞추어 걷는 것이다. 엄마가 조급해 아이를 다그치면, 아이는 끈을 풀고 경기장을 떠난다.


규칙을 잘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함께 경기를 완주하려면, 이해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아이가 끈을 풀어도 그 자리에만 있으면 된다. 다시 끈을 묶어 함께 걸으면 된다. 백 번, 이백 번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아이가 멀리 달아나도 ‘내 잘못’이라며 자책하지 말자. 아이는 원래 도망가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지구 밖까지 달아나진 않는다. 엄마는 그저 보이는 모든 곳에 ‘나는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걸어두면 된다. 결국 아이는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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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홍보캡처.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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