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아로서의 삶과 참자아로서의 삶, 나는 그중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자아가 축적해 온 경험과 지식은 늘 나에게 유리한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겉으로는 도움이 되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내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할 것은 잠들어 있고, 낮아져야 할 목소리는 오히려 함성을 지른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가난이 두렵고, 무시당할까 봐 두렵다. 병에 걸리는 것이 두렵고, 죽는 것이 무섭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질까 봐 두렵다. 이처럼 원초적인 두려움을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불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늙도록 태어났다. 늙음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아프도록 태어났다. 병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죽도록 태어났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에게 귀중한 모든 것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변하도록 태어났다. 그들과 헤어짐을 피할 길은 없다. 내 행동과 말, 마음은 스스로 행한 것이다. 내 행동은 나의 연속체다.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르다. 후자는 충격이지만 동시에 큰 힘이 된다. 좋은 것에만 머물던 시선을 그렇지 않은 것들로 옮길 수 있게 해 준다. 원래 그런 것이라면, 좋고 나쁨으로 나뉠 이유도 없다. ‘원래 그렇다’는 말은 체념이 아니라 받아들임의 대상이다. 온전히 받아들여질 때, 그로부터 비롯되는 고통은 사라진다.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미움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그것을 지우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애쓰지만 어느 순간 다시 떠오른다. 자아와 참자아의 만남은 가까워지는 듯하지만 여전히 멀다. 우리는 노력하는 존재일까, 현존하는 존재일까? 노력은 과연 현존에 닿을 수 있을까?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습관 앞에 백기를 든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습관 자체가 굴레일 수 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길로 되돌아가려는 관성을,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자산이 폭등하는 시기에 한 조각도 주머니에 담지 못한 상실감은 무엇으로 치유될까? 뒤처졌다는 느낌은 숫자에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남는 건 그때의 감정이다. 더 가졌느냐보다, 그 시기에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오랜만에 친한 지인을 만나지만, 예전의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변한 걸까, 아니면 상대가 변한 걸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변한 쪽을 따지기보다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자유로워지기 위해 놓아야 할 것들은 많다. 건강, 관계, 돈. 그러나 놓으려는 마음은 오히려 움켜쥐려는 마음을 키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시간이 필요할까?
마음속에 있는 상념을 끄집어내고 싶다. 글로 드러난 그것들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 멋쩍고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렇게 끄집어내고 나면, 조금은 후련해진다. 폼 잡지 말고, 밀어붙이지 말자. 오늘 할 일만 하자. 아니, 지금 할 일만 하자. 딱 거기까지만 하자.